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 심성미 기자 ]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주인공은 교수, 왕, 공무원 같은 어른들에게 한 사물에 대한 그림을 보여준다. “이게 무엇으로 보이나요?” “모자.” 예외없는 대답이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그림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봤다.
어른들과 어린왕자의 대답이 달랐던 이유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다만 어른들은 사물의 겉모양새만 보고 판단했고, 어린왕자는 표면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더 깊이 있게 사물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특히 어른들은 쓸모나 필요의 차원에서만 사물을 봤지만 소설 속 어린왕자는 이 관점이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는 유일한 관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신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에서 어린왕자처럼 칫솔 단추 사다리 만년필 등 우리에게 익숙한 67가지 사물을 향해 낯선 질문을 던지며 색다른 사색을 풀어놓는다.
저자는 매일 목적지를 향해 오르내리는 계단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 같은 폭, 같은 넓이, 같은 재질로 이뤄진 계단을 바라보며 저자는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떠올린다.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면 돌이 다시 밑으로 굴러 내려가 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는 고통을 설명하며 저자는 “인간에게 육체적 노역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파생시키는 권태, 삶의 ‘무의미’”라고 말한다.
저자는 요새 청소년들이 앞머리에 구르프(헤어롤)를 달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현상도 눈여겨본다. 예전에는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이런 모습이 유행처럼 돼버린 것을 보며 그는 10여 년 전 유행한, 팬티가 보이도록 느슨하게 걸쳐 입는 힙합 바지나 브래지어 끈 노출패션을 떠올린다. 저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헤어롤을 달고 다니는 건 타인의 시선이나 억압에 대한 발랄한 도전이자 뻔뻔함의 현상학과 관련 있다”고 설명한다.
만년필을 보고 저자가 상상한 것은 창과 방패다. 뾰족한 촉은 찌르는 창이고, 펜촉 몸뚱이는 모가 나지 않은 삼각 방패 모양이다. 저자는 “‘모순(矛盾)을 한몸에 담고 있는 만년필로 쓰는 글은 찌르되 동시에 해치지 않는 것, 표면의 날카로운 논리가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우리가 다른 시선을 가질수록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책이다.(세종서적, 284쪽, 1만6000원)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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