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산 재벌 맥도널더글러스의 전신인 더글러스항공이 1948년 설립한 랜드(RAND)연구소는 대표적인 싱크탱크다. 원래는 군사 문제에 정통한 곳이지만 지금은 광범위한 분야의 미래를 과학적으로 예측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랜드연구소가 지난해 자율주행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자율주행차가 사람이 운전할 때보다 10%만 안전해도 50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주행 지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서둘러 보급하는 게 유리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자율주행차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전문가들은 ‘완벽한 기술 구현’이 전제되지 않은 보급은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10억 마일당 5.75명인 자동차 사망자가 0.06명인 항공기 수준에 도달하는 시점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자율주행 기술 발전 속도는 매우 빠르다. 특히 스마트폰 보급으로 덩치를 키운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자율주행차를 주목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자율주행차 상용화 시기가 이르면 2023년, 늦어도 2030년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얼마 전 우버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일으켜 보행자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속 60㎞로 달리다 도로 옆 수풀에서 갑자기 나타난 보행자를 그대로 치어 숨지게 했다. 이후 우버는 자율주행 시험을 전면 중단하고 원인 찾기에 나섰다. 사고는 없지만 도요타 또한 일시적으로 자율주행 시험을 멈추고 시스템 진단에 들어가는 등 세계적으로 자율주행차의 사고 책임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이전의 자율주행 사고는 탑승자 피해였지만 우버의 경우 보행자 사망이라는 점에서 시선이 쏠렸고 기술적 완성도를 포함한 시험 주행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치열한 논쟁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자율주행의 사고 책임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어서다. 극한 상황에서 보행자와 탑승자, 누구를 안전하게 지켜낼지 선택하는 ‘트롤리 딜레마’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선택이다. 그래서 최근 자율주행 경쟁은 기술 외에 제도 마련으로 옮겨가고 있다. 자율주행 사고 피해 책임 소재가 명확해져야 보급이 빨라질 수 있어서다.
지난달 영국 정부가 세계 최초로 자율주행 사고 피해 구제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자율주행차 사고가 발생하면 1차적으로 자동차 보험사가 피해자에게 처리 비용을 지급토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물론 보상 이후 원인에 따른 책임 문제가 남지만 피해자를 위해 보험사가 먼저 역할을 맡는 방식이다. 현재 하원에 발의된 법안은 여야가 모두 동의한 사안이어서 올해 처리될 전망이다. 이를 두고 영국 정부는 사고 가능성 때문에 자율주행차 대중화를 늦출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항공기 수준의 안전성도 중요하지만 인간 운전자보다 10%만 안전해도 된다는 랜드연구소의 주장에 영국이 힘을 실은 셈이다. 여기에는 18세기 제임스 와트에서 시작한 1차 산업혁명의 영광을 4차 산업혁명에서 다시 주도하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다. 또 기술적 오류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도 담겨 있다.
권용주 < 오토타임즈 편집장 soo4195@autotime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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