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온도] 어떤 사직서

입력 2018-03-18 14:34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의 여행에세이

"세상은 넓으니 떠나야겠습니다"
이를 본 상사는 "당신을 이해한다"


[ 최병일 기자 ] ‘세상은 넓다, 떠나서 둘러보자(世界邦廣大,我想去看看).’

2015년 4월 한 장의 사직서가 중국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중국 장저우의 하남실험중학교에 재직 중이던 선생님이 10글자로 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사직 사유로는 ‘세계가 이렇게 넓으니 내가 한번 가봐야겠다’는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중국 네티즌은 이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느낌이 강렬한 사직서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사직서는 2015년 중국에서 유행어 중 1위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이 사직서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관련 패러디물이 쏟아졌습니다.

중국 후난성 창사의 한 광고기획회사에 다니는 리우라는 여성 카피라이터는 단 7단어만 적은 사직서를 냈습니다.

‘겨울이 너무 추워, 일어날 수 없다(冬天太冷起不來).’

이 사직서를 본 상사는 사직을 허락하면서 두 글자를 남겼습니다.

‘당신을 이해한다().’

좁은 직장의 울타리를 벗어나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직장상사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깨졌을 때나 무력감에 빠질 때면 가슴 안쪽에 담고 있는 사직서를 만지작거립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니 99%의 직장인은 사직서를 함부로 날리지 못합니다. 사직서는 회사를 베는 칼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가슴을 베는 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직서라는 칼로 세상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 때문에 가슴에만 품고 있다 결국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하고 퇴직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히려 회사에서 휘두르는 해고의 칼날을 용케 피해온 것에 안도의 한숨을 몰아쉽니다.

최근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라는 독특한 제목의 일본 영화가 잔잔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주인공은 무력한 직장인의 모습을 절절하게 그려냅니다. 어느 날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살려준 정체불명의 동창을 만나고 나서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회사가 전부인 그였지만 이제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삶은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다시 사직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중학교 선생님은 왜 하필 사직의 이유가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일까요? 더 좋은 직장으로 전직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행을 갔다 오면 더 좋은 직장이 그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오직 세상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직장을 그만둡니다.

잘 아는 후배도 그랬습니다. 잘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떠났습니다. 학벌도 좋고 성격도 좋은 데다 능력도 뛰어나 그 직장에서 얼마든지 잘나갈 수 있었는데도 모든 걸 포기하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거의 1년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그는 여행작가가 됐습니다. 그는 여행을 통해 진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때로는 고독했고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이 보석처럼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늘 무기력하고 다음 날이 기대되지 않았는데 요즘은 매일매일이 설렌다고 합니다. 잡지나 신문에 원고를 기고하면서 받는 돈은 전 직장에서 받던 연봉의 반에도 못 미칩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더 빛이 납니다. 늘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생은 여행이라는 말’은 사실 진부하기 그지없습니다. 진짜 여행을 떠나야 인생을 아는 것도 아니지만 삶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삶의 비밀을 알고 싶어 예수님도 부처님도 무함마드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나야 아는 것. 그 비밀을 알고 싶어서 오늘도 운동화를 신고 길을 떠납니다.

가슴속에 숨겨둔 칼을 휘두르지 않고 업무로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행복으로 여기면서 또 다른 발걸음을 시작합니다.

skyc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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