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탐구] 7년째 '돈 안 되는 잡지' 펴내는 회장님 "한국의 얼과 문화, 청년들에게 전하죠"

입력 2018-03-06 19:44
계간지 '보보담' 발간… 구자열 LS그룹 회장

학창시절 반한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 · '샘이 깊은 물'
한국의 판소리·민요까지 다뤄
폐간 후 헌책방서 구해 읽기도

"왜 지금은 이런 잡지 없나"
직접 계간지 '보보담' 출간 결심
조선 왕릉부터 장터 할머니까지
한국과 한국인의 삶 생생히 전달

"돈 벌기 위해 시작한 일 아냐
회사 문 닫을 때까지 계속 발간"


[ 고재연 기자 ] 구자열 LS그룹 회장이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1976년. 당시 그가 가장 좋아한 책은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이던 고(故) 한창기 씨가 ‘한국인을 위한 잡지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출간한 잡지였다. 잡지에는 한국 전통문화부터 판소리와 민요까지 ‘한국인의 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잡지를 읽으면 당시 서민의 삶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이 잡지는 전두환 정부 때 강제 폐간됐다. 한씨는 1984년 출간한 여성 월간지 ‘샘이 깊은 물’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전통문화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던 ‘샘이 깊은 물’은 한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2001년 폐간했다. 이후 몇 년이 지나도 비슷한 잡지는 나오지 않았다. 구 회장은 전국 헌책방을 수소문해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전권을 수집했다. 태블릿 PC에 넣어두고 몇십 번을 읽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왜 요즘은 이런 잡지가 나오지 않을까.” 회사의 젊은 직원들이 떠올랐다. 똑똑한 친구들이지만 ‘넓고 얕은 지식’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정보를 얻는 창구는 TV와 인터넷에 한정됐다. 주로 단편적인 지식이었다. 해외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지만 정작 한국의 이야기는 잘 알지 못했다. 젊은이들에게 한국인의 얼을 담은 잡지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LS네트웍스가 2011년 7월부터 발간한 계간지 ‘보보담(步步譚)’은 그렇게 탄생했다. ‘함께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구 회장이 직접 편집 주간(主幹)을 맡았다. 매번 편집노트도 작성했다.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일반적인 사보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250쪽 중 광고는 단 한 쪽. 내용과 무관한 광고가 전체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보보담 2호의 주제는 산티아고 순례길. 인터뷰 대상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김훈 작가였다. 자전거광인 구 회장이 김훈 작가와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돌았던 게 인연이 됐다. 김훈 작가는 당시 인터뷰에서 ‘자전거 타기는 삶의 구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했다. 함께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라는 주제에 꼭 맞는 내용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보담은 이국 풍경보다 한국의 인문 풍경을 담는 데 집중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자’는 생각에서다. 한국의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그 땅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형식으로 꾸몄다. 지난겨울에는 조선 왕릉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서울과 경기지역에는 조선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의 능과 원, 묘가 119기나 흩어져 있다. 보보담은 조선 궁궐에 비해 비교적 덜 조명받던 능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주류의 역사’만을 전하지는 않았다. 작년 가을 평창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대산의 불교문화부터 오대산 칼잡이 스님 설화, 봉평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하면 생각나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고된 노동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평창 아라리’까지…. 구 회장은 편집노트에서 평창의 문화를 ‘척박한 땅에 핀 고운 꽃’이라고 표현했다. 보보담은 이처럼 그간 주목받지 못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에 주목했다.

삶의 터전에서 만난 서민들의 목소리도 생생하게 담아냈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장사했다는 대원상회 김계분 할머니의 목소리도 날것 그대로 전했다. “서문시장은 암것도 업꼬, 금달래가 머리에 꽃 꼽고 춤추고 댕깃다. 아무나 앉으면 장이 되고, 좌판만 깔면 시장이 됐다 아이가.” 대구 교동시장에서 다방 주인, 생닭집 사장, 왕십리해장국 사장, 아모레·주단학화장품 판매왕을 거쳐 서울순대 사장이 된 이은주 할머니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느 날 사별한 남편이 꿈에 나와 큰 통에 돼지 창자를 삶아주면서 ‘니는 이 장사해라’ 카더라고.” 남편이 꿈에서 알려준 대로 순대 장사를 하니 대박이 났고, 할머니는 TV에 20번 넘게 출연할 정도로 유명인이 됐다.

주제 선정부터 잡지가 발간되기까지 구 회장은 모든 과정에 직접 관여한다. 평창편을 기획할 땐 편집자들과 1970년대 평창에서 처음으로 스키를 탔던 경험을 공유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곳곳을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혹은 숨어 있는 명소를 발굴하기도 한다. 손호영 LS네트웍스 홍보부장은 “잡지를 찍어내기 전 피드백을 받기 위해 회장님 사무실에 들어가면 두 시간이 넘도록 보고가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잡지에 대한 애정이 크다.

잡지를 만드는 데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기존 콘텐츠를 재가공하거나 상업용 이미지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보담 편집국에서 직접 생산한 콘텐츠만을 담는다. 편집장이나 사진작가가 길게는 두 달을 지역에 가서 살면서 사람과 풍경을 담는다. 한 사람의 인터뷰 기사를 위해 그를 예닐곱 번씩 찾아가기도 하고,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같은 장소를 서너 번씩 찾기도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논문을 찾아보거나 학자들을 자문해 보보담만의 자료를 만들어낸다.

약 5000부를 찍는데, 배송비를 포함해 한 호를 제작하는 데 1억원 이상이 든다. 1년에 4억~5억원을 보보담 제작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전국 800여 곳의 공공도서관과 300여 곳의 대학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구독 신청을 한 일반 독자에게 무료로 배송한다. 7년간 묵묵히 발간하자 ‘팬’도 생겼다. 독자들은 보보담에 담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팀을 꾸려 지역 답사를 떠난다. 무가지를 발간하는 구 회장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정성스러운 뜨개질로 선물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자신이 사는 지역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도 많다. 한 독자는 “보보담은 한 계절을 오롯이 견뎌내야만 만날 수 있는 책”이라며 “읽고 나면 왠지 건강한 보양식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듯 든든함을 준다”고 표현했다. 지난해에는 기업 홍보물 분야 세계 3대 시상식인 머큐리어워드에서 예술·문화잡지 부문 단독 은상을 받았다.

사내에서는 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웹진으로 바꾸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종이 잡지를 고집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니 돈을 벌어야 하는 잡지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구 회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더 귀한 한국인의 일상을 후세에 남기고 싶다”며 “회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보보담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 콜럼버스 이름 딴 '크리스토퍼 구', "최대 관심사는 4차 산업혁명"

구자열 회장의 영어 이름 의미

구자열 LS그룹 회장(사진)의 영어 이름은 크리스토퍼 구다.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따왔다. 콜럼버스처럼 도전하며 살겠다는 의미다.

최근 도전하고 있는 분야는 ‘4차 산업혁명’이다. 지난 1월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쇼 ‘CES 2018’에도 참석했다. LS전선 LS산전 LS엠트론 등 전통제조업 일색인 계열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의 CES 방문은 이례적이다. 구 회장은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화웨이 DJI 도요타 다소 등 중국과 일본 기업 전시장을 두루 찾아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 로보틱스 등 첨단 기술을 꼼꼼히 살펴봤다. 디지털 혁신으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종(異種)산업에서도 배울 게 많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2015년부터 “제조업의 근간을 바꿀 디지털 혁명 시대에 선제 대응해야 한다”며 주요 계열사 제조공정에 스마트 팩토리 도입을 주도하는 등 그룹의 디지털 전환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구 회장은 중국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의 부상을 몸소 체험하며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확인했다고 한다. 직원들에게 “LS가 주력으로 삼고 있는 전력, 자동화,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 분야에서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과 적극 협력해 중국을 위협이 아니라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다.

혁신의 바탕이 되는 기술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임직원에게 연구개발(R&D)을 강조하며 최고기술책임자(CTO) 간담회, 기술협의회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기술 생태계 구축에도 앞장서고 있다. 국가지식재산위원장, 한국발명진흥회장을 맡으면서 개인과 중소기업이 보유한 특허기술을 사업화하고 공유하는 등 지식재산 생태계 구축에 힘쓰기도 했다.

▶구자열 LS그룹 회장 프로필

△1953년 서울 출생
△1972년 서울고 졸업
△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78년 LG상사 피혁기획부 입사
△1992년 LG상사 일본지역본부장
△1995년 LG투자증권(현 우리투자증권) 국제부문 총괄임원
△2000년 LG투자증권 영업총괄 부사장
△2001년 LG전선(현 LS전선) 재경부문 부사장
△2004년 LG전선 대표이사 부회장
△2008년 LS전선·LS니꼬동제련·LS엠트론 사업부문 부회장
△2009년 LS전선·LS엠트론 사업부문 회장
△2013년 LS 회장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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