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운동 단일정당으로 최다득표
9년 전 온라인 여론 기반으로 출발
반난민 정서 속 극우 약진
불법이민·경기침체가 표심 갈라
극우동맹과 합쳐 50%이상 득표
"우파연합 중심으로 정부 구성"
살비니 극우동맹 대표, 총리 도전
[ 허란 기자 ] 이탈리아에서 4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 결과 반(反)체제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 정당인 오성운동이 단일 정당으로는 최다 의석을 차지했다. 오성운동은 내각 구성의 ‘운전자’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파연합과 중도좌파연합 간 ‘불안한 동거’ 체제의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반유럽·반이민’을 고리로 오성운동과 극우정당동맹이 힘을 합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국 BBC는 “유럽연합(EU)의 4대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하면서 역내 자본시장과 정치권의 우려가 커졌다”고 평가했다.
반체제·극우정당 50% 이상 득표
5일 이탈리아 내무부에 따르면 99% 개표 결과 오성운동은 하원 의석(630석) 기준 32.7%, 상원 의석(315석) 기준 32.2%로 최다 득표율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오성운동은 정치 풍자 코미디언이자 파워블로거인 베페 그릴로(69)가 부패한 정치에 대한 인터넷 반발 여론을 기반으로 2009년 세운 정당이다.
극우동맹, 전진이탈리아(FI), 이탈리아형제들(FDI)로 구성된 우파연합은 하원 선거에서 정당 합산 기준 최다 득표(37%)를 기록했다. 하지만 정부 구성에 필요한 최소 득표율(40%)엔 미치지 못해 우파연합의 힘만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이끄는 중도좌파연합은 22.9%의 득표율로 3위에 그쳤다. 실업률과 이민자 증가에 따른 심판을 받았다는 평가다.
이번 총선에서 오성운동과 함께 주목받은 것은 극우동맹의 득세다. 우파연합 내에서도 마테오 살비니가 이끈 극우동맹(17.4%)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81)가 이끈 중도우파성향 FI(14%)보다 더 많은 표를 얻는 이변을 연출했다. 강경한 반이민 정책을 내세운 극우동맹이 더 많은 호응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반체제(오성운동)·극우(극우동맹)정당의 득표율이 50%가 넘은 것을 놓고 “이탈리아 유권자들이 기득권에 철퇴를 가했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거캠페인 책사였던 스티븐 배넌은 “이탈리아 총선은 순수한 포퓰리즘의 전형”이라며 “이탈리아는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이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선출한 미국보다 더 빨리 더 멀리 갔다”고 평했다.
오성운동은 반유럽·반이민을 내걸며 지지율을 높였지만 이탈리아 특유의 부패한 정치문화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다.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포퓰리즘을 대변하는 민족전선의 자매정당이 극우동맹이다. 2013년 총선에서 북부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극우동맹은 반난민 기류를 타고 남부 지역에서도 지지율이 수직 상승하면서 ‘북부’라는 이름을 떼어버렸다.
이민·경제 정책이 가른 표심
이번 총선에서 최대 화두는 반이민 정책이었다. 2013년 이후 리비아 등에서 지중해를 건너온 이민자가 60만 명이 넘었다. 중도좌파연합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불법이민자 국외추방 등 반이민 정책을 내세웠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불법이민자를 ‘사회적인 시한폭탄’으로 규정했다.
경제 문제는 표심을 가른 또 다른 분야였다. 이탈리아 경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유권자들의 기대엔 못 미치는 상황이다. 빈곤층은 1800만 명(2016년 기준)으로 금융위기 이후 300만 명가량 급증했다. 실업률은 11%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가운데 세 번째로 높다. 정부 부채 수준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30%로 그리스 다음으로 높다.
반EU 분위기 고조
EU는 이번 총선에서 반체제 정당과 극우 정당이 득세한 것을 우려하고 있다. 오성운동과 극우동맹은 모두 ‘EU 탈퇴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가 중도 표를 의식해 막판에 이를 철회했다. 이탈리아가 당장 EU를 탈퇴할 가능성은 작지만 이들 정당이 내각에 들어오면 EU에 대한 회의주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될 전망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이 깊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물론 극우동맹, 오성운동 모두 친러시아 성향이다. BBC는 “친(親)러시아 정당 간 대연정이 러시아 제재 등 EU의 의제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차기 총리는 대통령의 지명을 거쳐 의회 신임투표로 결정한다. 살비니 극우동맹 대표는 이날 밀라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치 주체는 최다 득표를 한 우파연합이 돼야 한다”며 사실상 총리직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루이지 디마이오 오성운동 대표는 운전자 역할을 하겠지만 우파연합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리가 될 가능성은 낮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탈세 판결로 2019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우파연합과 좌파연합 간 대연정이 이뤄질 경우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내세우는 안토니오 타나지 유럽의회 의장이나 파올로 젠틸로니 현 총리가 임명될 가능성이 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