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가로막는 기득권 벽을 깨자
특권 내려놓은 독일·스웨덴 노조
"기업 살아야 일자리 생겨"
독일, 단체협약 대신 '회복협약'
무급 근로 늘리고 임금 줄여
일자리 나눠 감원 최소화
스웨덴도 상시 '위기계약'
근로시간 17%, 임금 12%↓
대기업 노조 특권도 없다
산별노조가 협약 체결하면
비정규직·협력사에도 적용
[ 고경봉 기자 ]
“구조조정은 아쉽지만 기업이 살아야 스웨덴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생긴다.”(하칸 스코트 전 IF메탈 위원장)
2000년대 중·후반 독일과 스웨덴 정부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공장 폐쇄’를 무기로 삼으며 자금을 요청하자 지원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독일 정부는 2009년 위기에 빠진 GM 독일 공장 회생을 위해 15억유로(약 2조원)를 브리지론(단기 대출) 형태로 지원키로 결정했다. 독일 언론들이 “협박에 취약한 나라로 인식될 것”이라며 우려를 쏟아냈지만 연방하원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앙겔라 메르켈 정부는 근로자의 표심을 택했다.
앞서 스웨덴도 GM 산하 사브 공장 폐쇄 우려에 2004년께부터 20억크로나(약 2600억원)를 사브 지원에 쏟아부었다. 사브 청산 당시 스웨덴 금속노조인 IF메탈을 이끌었던 하칸 스코트 전 위원장은 “GM은 ‘미인대회’를 하듯이 유럽 공장 간에 경쟁을 시켰다”며 “생산성을 높인 곳은 신차 생산을 맡기는 혜택을 주고 그렇지 못한 곳은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해당 국가 정부에 손을 벌렸다”고 회고했다.
◆노조가 임금삭감 주도
독일과 스웨덴은 하지만 두 번 당하지 않았다. GM이 추가 자금을 요청하자 노동계와 지역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원을 거절했다. 결국 공장이 폐쇄되면서 수천 명이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노동조합과 사측, 노조와 정부 간 갈등은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스웨덴은 높은 인건비와 산업구조 변화로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등을 돌리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태가 이어졌다. 두 국가 모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가 있었음에도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집단행동 대신 고통을 분담하는 방식을 택했다.
독일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비상경영체제인 회복협약(Sanierungstarif)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회복협약은 2~5년 동안 무급 근로를 늘리거나 임금을 줄여 인건비를 낮추는 내용이다.
독일 철강업체 티센크루프가 대표적 사례다. 2013년 당시 세계적인 철강 공급과잉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노사가 회복협약을 통해 2020년까지 주당 근로시간을 3시간씩 줄이기로 합의했다. 임금도 이에 맞춰 7~8%가량 줄이기로 했다.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나눈 덕에 구조조정 대상 2000여 명 중 1500명가량이 자리를 지켰다.
독일 최대 노조인 IG메탈의 위베 핑크 임금정책국장은 “더 어려운 기업은 임금을 삭감하고 보너스까지 없앴지만 회복협약에 대한 반발은 크지 않았다”며 “구조조정을 최소화하려면 전 근로자가 고용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GM도 경영위기가 가속화된 2000년대 이후 수차례 회복협약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노동자 천국’으로 불리던 스웨덴도 2009~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자 ‘위기계약(Krisavtal)’을 도입했다. 위기계약으로 스웨덴 근로자 10만 명가량에 대해 근로시간을 17% 단축했고, 임금은 12% 삭감했다. 스웨덴 최대 노조인 LO의 소피 랜스트롬 노동국장은 “당초 2010년 10월까지 시행하는 한시적인 비상경영체제였지만 이후 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자 상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스웨덴 전체 제조업체 중 22%가, 철강산업에서는 47%가 이 제도를 시행했다”고 말했다.
◆특권 없는 정규직 노조
독일과 스웨덴의 비상경영체제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폭넓게 적용됐지만 노사 갈등이나 노노 간 갈등이 불거지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일에선 IG메탈 등 주로 산별노조가 협약을 체결하면 모든 개별기업 근로자에게 적용된다. 스웨덴도 마찬가지다. 경우에 따라 협력업체와도 같은 내용의 협약을 맺는다.
독일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노무관리 담당자는 “한국은 비정규직이 먼저 해고되고 비노조원, 협력업체가 희생을 당하는 동안 대기업 노조는 상급노조 지시를 받아 투쟁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독일은 비상경영체제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상급노조가 협상을 맡아 처리하고 비노조원, 비정규직, 협력업체 등에 동등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비상경영 전환 속도가 빠르다”고 설명했다.
박명준 경제발전노사정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독일 등은 상급노조가 단체협상을 하면 업계 전반에 동등하게 적용되다 보니 대기업 노조라고 해서 상대적으로 큰 특권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과 가장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스톡홀름=고경봉 기자/심은지 기자 kg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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