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진인사대천명

입력 2018-02-22 18:28
장병우 <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bobjang1@naver.com >


독서를 즐기지 않더라도 푸른 눈의 중국인으로 반평생을 살고 《대지(大地)》를 써 미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1892~1973)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지의 주인공 왕룽(王龍)과 헌신적인 아내 오란(阿藍)은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본보기다. 이 작품은 중국이 배경이고 오란은 중국 여자이긴 하지만, 펄 벅은 자기가 그린 인물은 ‘중국인’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했다.

토막집의 농부 왕룽은 황대인(黃大人) 집의 여종 오란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그녀는 밭에 나가 괭이질을 하며 남편을 도왔다. 자주 바구니를 들고 큰길로 나가 밭에 줄 비료로 쓰기 위해 노새, 당나귀, 말들의 똥을 주워다가 마당에 쌓아 올렸다. 나뭇가지와 낙엽을 긁어모아 땔감으로 썼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누더기를 꺼내어 손수 물레질을 해서 빼낸 실로 헝겊을 대고 기워 겨울옷을 장만하기도 했다. 결혼 첫해의 추수는 풍작이었다.

그들이 수확한 곡식 대부분은 팔 것이었으나 왕룽은 때를 기다리기 위해 그것을 팔지 않았다. 그는 값이 가장 헐한 추수기에 잘 갈무리해 두었던 곡식을 눈이 내리기 시작하거나 성안 사람들이 비싼 값을 내고도 식량을 사기 원하는 설날 직전을 타서 내다 팔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왕룽은 오란과 함께 부지런히 일하고 야무지게 저축한 돈으로 황대인의 비옥한 땅을 한 뙈기, 또 한 뙈기 사들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가난한 농부였던 그가 대지주가 돼 성내 황대인의 저택마저 차지하게 된다.

미국인의 근검절약 정신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號)를 타고 신대륙에 상륙한 영국인 청교도들에게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배를 타고 온 120명 중에서 첫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그 반수가 죽었다. 나머지 사람은 생존을 위해 남녀 모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개척과 농경에 힘썼다. 미국 역사책은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근면과 절약을 동시에 실천했으며, 실속을 중시하는 습성이 오늘의 풍요로운 미국을 건설한 원동력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것이다.

오란과 왕룽이 부자가 된 배후에는 행운도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영어로 재산을 뜻하는 ‘fortune’이란 낱말엔 ‘행운’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행운은 신의 섭리와도 같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은 만고의 진리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