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에게 우상은 조롱거리지만
다른 이에겐 경외의 대상일 수도
지나친 허물 들춰내기 집착해
국민 마음 속 우상 파괴 말아야"
양봉진 < 세종대 석좌교수 >
한국인의 긍지를 드높여준 세계 테니스계의 떠오르는 샛별 정현. 그는 지난달 22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자신이 꺾은 노박 조코비치를 “어릴 적 우상”이라고 치켜세웠다. 지난 9일 한창 열전에 들어간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막을 횃불로 밝힌 김연아는 미래 올림픽 무대에 서 보고 싶은 피겨 스케이팅 꿈나무들의 우상임에 틀림없다.
누구에게나 우상은 있다. 그러나 그런 우상들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어디든지 있을 수 있다. 이들에겐 그런 우상이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거리에 불과할 수 있다. 미국인들에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이끌어 낸 우상이다. 하지만 《링컨의 진실(The Real Lincoln)》을 쓴 토머스 딜로렌조에겐 “패권주의에 매몰된 야비한 대통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링컨이 주도한 남북전쟁은 남부 흑인노예를 농장주들에게서 빼앗아(해방시켜) 급격히 산업화된 북부의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경제전쟁’에 불과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1990년대 미국사회는 ‘미국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이 흑인노예에게서 자식을 뒀다는 기사로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워싱턴DC에 자리 잡은 링컨 기념관과 제퍼슨 기념관은 옛 모습 그대로 미국인들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반면 중국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은 공자 무덤까지 훼손해가며 중국인들의 우상을 파괴했다. 세월이 흘러 공자라는 우상이 다시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지만, 문화혁명 당시 공자에 대한 폄훼는 탈레반의 바미안 석불 파괴와 다를 바 없는 야만의 역사 그것이었다.
폴 존슨은 그의 저서 《지식인의 두 얼굴》을 통해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위대한 정신병자’로 불린 《사회계약론》의 장자크 루소, ‘위선과 허위의 바다’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당한 《노인과 바다》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행동하지 않는 지성’으로 묘사된 실존주의 철학자 폴 사르트르 모두 누군가의 우상이지만 그 이면 세계는 전혀 딴판이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마음속 우상에서 지웠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은 우리의 우상이다. 하지만 세종이 명나라를 떠받드는 사대주의적 군주였을 뿐 아니라 장인이 타계했어도 상왕(上王)인 태종의 눈치를 보느라 문상(問喪)도 가지 않은 냉혹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들춰내는 사람들에겐 온전한 우상으로 남아 있기 어렵다. 《난중일기》에 두 여자를 데리고 잤다고 기록해 놓은 이순신 장군의 경우는 어떤가. 최영미 시인이 ‘En’이라는 시인의 성추행을 들춰내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투(#MeToo) 프레임’에선 왜(倭)와의 전쟁 중에 성문란 행태를 마다하지 않은 역적으로 몰릴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마음속의 우상으로 남겨 놓는다.
“우상은 허상이나 편견”이라는 게 프랜시스 베이컨의 설명이다. 자기가 만든 우상이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하면서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우상을 웬만하면 그대로 안고 가려는 관성과 습성을 보인다. 그게 문명사회의 지혜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진행형인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우리 국민 각자 마음의 우상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적폐 중 가장 큰 적폐는 김일성 일가와 그들이 벌여 놓은 핵과 미사일 문제다. 이보다 더 가공할 큰 적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