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변동때마다 개입하던 당국
올 엔화 가치 4% 이상 뛰었는데
시장 예측과 달리 '노코멘트' 일관
7일 아베 총리-펜스 부통령 회담
경제대화·북핵 공조 등 현안 논의
"미국 자극 않으려는 일본의 노림수"
외환시장 변동 속 일본은행 행보 갈림길
"강력한 금융완화 정책 지속할 것"
[ 김동욱 기자 ] 올 들어 3주 사이에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4% 넘게 오르는 등 ‘엔고(円高)’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일본 재무부를 비롯한 정책당국 고위관계자들은 과거와 달리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시장을 주시하고 있다”거나 “필요하다면 대처하겠다”는 의례적인 발언조차 모습을 감췄다. 일본이 향후 미국과의 경제 분야 마찰을 피하려고 저자세 정책을 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환율 변동에 ‘입 닫은’ 정책당국자
6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난달 9일 이후 잇따라 달러화 대비 엔화가치가 뛰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엔화 강세를 촉발한 주역이 미국인 만큼 향후 통상 마찰 등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1월 초까지 달러당 112~113엔대를 유지하던 엔화가치는 지난달 9일 일본은행(BOJ)이 장기국채 매입 규모를 축소한다고 밝히면서 달러당 111엔대로 뛰었다. 24일에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가 “물가가 목표치(2%)에 접근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이 양적완화 정책 종료 시점이 다가오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엔화가치가 108엔대로 다시 급등했다. 여기에 24일(현지시간)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이 “약(弱)달러가 무역 등에서 미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며 약달러를 용인하는 발언을 하면서 엔화가치는 지난달 27일 4개월 반 만의 최고치인 달러당 108.58엔까지 높아졌다. 6일에도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08.79엔에 거래를 마칠 정도로 엔화 강세가 지속됐다.
BOJ와 재무부, 금융청 및 주요 금융회사 관계자들은 지난달 29일 부랴부랴 국제금융과 자본시장 관련 정보교환 회의를 4개월 만에 열었다. 하지만 실무선인 아사카와 마사쓰구 재무부 재무관이 “(최근 엔고 현상) 배경에 투기적 움직임이 없는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시하겠다”고 말한 것 외에 고위급의 발언은 없었다. 재무부 등이 시장 움직임을 견제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엔화가치가 올라가면 일본 기업의 수출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일본 정부의 ‘탈(脫)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 정책에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외환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금융당국이 손을 놓는 모습을 보이자 시장 관계자들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미국 자극하지 말자” 저자세 보이는 일본
일본 정부가 과거와 같이 외환시장에 적극 관여하지 못하는 것은 최근 들어 동맹국인 미국이 환율 급변을 주도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엔화 강세를 심화한 므누신 장관의 발언에 일본이 철저하게 함구한 점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싣는다. 일본 정부와 달리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달러화 약세를 촉발한) 미국이 통화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 규범을 공공연히 어기고 있다”고 강하게 대처하는 등 대조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직후 엔화 강세가 연출되던 때에도 일본 정부는 미·일 경제대화 성사와 미국의 환율조작국 지정을 피하기 위해 환율 관련 발언을 일절 내놓지 않는 ‘침묵의 봄’을 연출한 바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간 회담을 앞두고 일본 정부가 통화정책을 놓고 미국과 마찰을 빚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며 “향후 미·일 경제대화를 원만히 진행하는 것을 비롯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진전, 북한의 핵·미사일 공조까지 미국을 자극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다”고 짚었다.
◆통화 공급량 5년여 만에 첫 감소
외환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BOJ의 통화정책에도 변화 조짐이 엿보이고 있다. 올 1월 BOJ의 본원통화 공급량은 2013년 구로다 총재가 취임한 이래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BOJ의 올 1월 본원통화 공급액은 지난해 12월에 비해 연율환산 기준 4.1% 감소했다. BOJ의 본원통화 공급량이 줄어든 것은 2012년 11월 이후 5년2개월 만이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스텔스 테이퍼링(비공개적으로 국채 매입을 사실상 축소하는 정책)’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만간 양적완화 정책을 종료하는 움직임에 들어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일본 정부는 일단 기존의 양적완화 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5일 중의원(하원) 예산위원회에서 “경제의 선순환이 작동하기 시작한 만큼 BOJ가 경제목표 달성을 위한 대담한 금융 완화를 꾸준히 추진해나갈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구로다 총재도 “강력한 금융완화 정책을 줄기차게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