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필 기자 ] 야당 초선의원이 본 부끄러운 입법부
국회의 법안 발의 절차와 입법 과정이 갈수록 허술해지고 있다. ‘붕어빵 법안’ ‘날림 법안’ 등의 잘못된 관행이 20대 국회 들어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한쪽에서는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규제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여야 초선의원들이 털어놓은 입법 과정은 ‘요지경 국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
본회의 어떤 법안 상정될지 개회 직전에야 결정되니…
내 역할 뭔지 자괴감 든다
미리 요약본이라도 줘야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은 31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법안 처리 때 솔직히 무슨 법안이 있는지도 모르고 본회의에 들어가 찬성 버튼을 누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고백했다. 대표적 헌법학자인 정 의원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을 거쳐 국회 정치쇄신자문위원회 위원장, 박근혜 정부 행정자치부 장관을 거친 뒤 20대 국회 대구 동구갑에서 당선됐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이래선 안 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 중 하나였다”며 “그런데 막상 국회에 들어와서는 스스로 비판한 행동을 하고 있어 굉장히 불편하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내 역할을 충실히 잘하고 있는지 자괴감까지 든다”고 했다.
정 의원은 입법 과정에서의 부끄러운 실상도 털어놨다. 그는 “최소한 본회의 1주일 전에는 국회의원들에게 본회의에 올라올 법안의 내용 요약본이라도 줘야 한다”며 “그래야 뭐가 중요하고, 무엇은 찬성하고 반대해야 할지 정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씁쓸해했다. 의원 스스로 발의 과정에 참여했거나 관심을 가진 법안은 세부 내용을 알 수 있지만, 나머지는 법안 취지와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얘기다.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는 법안 대다수는 회의 시작이 임박해 확정되는 게 다반사다.
지난 29일 임시국회에서도 오전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32개 법안이 오후에 열린 본회의에 한꺼번에 상정됐다. 여야 대립으로 정상적인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법안이 여야 원내지도부의 막판 ‘주고받기식 흥정’으로 타결되면 협상에 참여한 일부 의원을 제외하고 아예 내용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본회의장에서 표결을 기다리던 의원들의 모니터에 한꺼번에 올라온 법안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정 의원은 과거 자신이 국회 행태를 맹비난한 일이 지난 연말에도 똑같이 벌어졌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연말 통과된 국회의원 세비 인상과 보좌진 확대를 담은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을 두고 하는 얘기다. 여야는 국회의원실 보좌진을 7명에서 8명으로 늘리고 의원 세비도 2.6% 올리는 안을 소리 없이 처리했다.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여야 원내지도부의 논의 끝에 전격 처리된 이 법안은 당초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정 의원은 “국회에서 인상 과정이 이슈화되지도 않은 가운데 본의 아니게 슬그머니 통과시키는 부끄러운 짓을 했다”며 “의원들도 자세히 모른 채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세비 인상분을 반납하기로 했다. 그는 “학계에 있다가 행정부를 거쳐 입법부에 가니까 예상치 못한 일이 너무 많다”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매일같이 스스로 자기검열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
사진=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