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사진' 개척자 정재규 씨 파리 진출 40년 기념 개인전
2일부터 가나아트센터서 회화·설치 등 100여점 전시
3년째 암과 싸우며 작업… 경주 문화재 조형성에 주목
사진·종이 가늘게 잘라 옷감 짜듯 '올짜기'로 배열
[ 김경갑 기자 ]
현대인의 일상이나 풍경을 찍는 사진작가는 많다. 춘하추동 자연의 풍광을 그럴듯하게 카메라 렌즈에 담아내는 사진작가 중에서 재프랑스 미술가 정재규 씨(68)는 다른 시선, 다른 내용으로 여타 작가와 구분된다.
그에게 사진은 조형예술을 재창조하는 소재다. 사진에 의한 정밀한 묘사력에 의존하면서도 대상의 기록이나 복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형화를 목적으로 제작된 그의 사진예술은 색채와 형태로 배어나온다. 무엇이 어떻게 찍혔는가보다 개인적인 기억과 역사적 사건을 ‘올짜기’라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시각화한 예술이어서 더욱 가멸차다. 30년 동안 고집과 끈기로 일궈낸 ‘정재규 조형사진’은 완성된 사진 이미지를 자르고 배열하는 기법으로 마치 기하학적 추상화처럼 보인다.
2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정재규 조형사진-일어서는 빛’전은 조형사진에 매달린 작가의 삶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는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전시장을 채운 100여 점의 작품은 2000년 이후 2차원 평면 사진을 입체적 시각예술로 재탄생시킨 역작이다.
31일 전시장에서 만난 정씨는 “사진이란 소재를 통한 작업은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조형예술의 형식 속에 사진을 포함시키고자 은근히 욕망해 봤어요. 사진의 복제가능성과 기록성이라는 정체성을 해체해 이미지가 가지는 시공간 구조를 관람객에게 일깨워주고 싶었거든요.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한데 결합한 게 바로 조형사진입니다.”
직장암으로 3년째 투병 중인 정씨는 서울대 회화과를 나와 1977년 제10회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해 일찍이 다소 낯선 조형사진의 세계를 인정받았다. 197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소나무회, 글로벌 아트그룹 ‘노방브르’ 등의 창립을 주도했다.
그가 파리에서 40년 동안 작품활동을 하면서 그림이 아닌 조형사진 예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사진이 눈에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진에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 작업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파리 근교에서 찍은 다양한 풍경 사진과 유명인의 얼굴 사진 이미지를 2~3㎝ 간격으로 잘게 자른 뒤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토막 난 나무 막대기에 붙였다. 가까이에서 보면 어떤 이미지를 붙였는지 식별하기 어렵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보면 전체 사진의 이미지가 들어온다. 토막 난 형상이 빚어내는 환각과 착시 현상인 셈이다.
완성된 사진 이미지를 자르고 배열하는 행위에 대해 그는 “결코 이미지의 부정이 아니다”며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것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포장지와 사진을 5~10㎜ 띠로 오려서 교차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누런 대형포장용 종이를 바탕지로 잘게 썬 사진 이미지를 교차시켜 올짜기를 한 다음 마지막 붓질을 통해 독특한 조형미를 녹여낸다.
“왜 포장종이냐”는 질문에 작가는 “우연”이라고 했다. “올짜기 재료가 다 떨어졌을 때 우연히 아틀리에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포장종이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포장종이와 사진이 함께하는 올짜기 작업을 시작했죠. 수묵 기법으로 선을 그린 작업은 중국 명청대 화가 팔대산인(1626~1705)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고요.”
그는 포용을 상징하는 포장지를 매개로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등 서양 미술가들의 작품을 현재의 모습으로 엮어내고, 경주의 불국사에 누런 색띠를 입힌다.
유럽 화단도 주목하고 있는 그의 작업에는 경주 사진이 자주 모티브로 등장한다. 경주 남산의 무두석불,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의 사진에 올짜기 작업을 통해 율동성과 생명성 같은 현대적 미감을 불어넣는다. 경주에 특별히 집착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경주는 세계가 주목해야 할 만큼 아름다운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현대인들은 조상들의 예술적 심경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다”던 그의 목소리가 사진 그림에 실려 귀를 울린다. 그의 조형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전시는 3월4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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