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유럽의 '징병제 붐'

입력 2018-01-23 17:44
BC 480년 전성기의 페르시아가 한줌밖에 안 됐던 그리스 연합군에 패퇴한 요인은 군대의 질(質) 차이였다. 페르시아 20만 대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2만 명을 잃고서야 스파르타 용사 300명(지원군 포함 1400여 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리스군의 ‘팔랑크스’ 백병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팔랑크스는 4~5m나 되는 장창과 방패로 무장한 200여 명 단위의 밀집대형이다. 측면과 후방은 무방비여서 동료에 대한 신뢰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대형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내땅은 내가 지킨다’는 애국심 투철한 자유민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강제 징집된 ‘잡탕 군대’와는 근본이 달랐다.

중세는 기사로 대표되지만 실상은 고용주를 위해 싸우는 프리랜서 용병 시대였다. ‘자유로운 창기병(free+lancer)’을 뜻하는 프리랜서는 월터 스콧이 소설 ‘아이반호’에서 처음 쓴 용어로, 중세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잦은 전쟁으로 ‘프로 싸움꾼’이 필요했던 왕과 영주와, 말 갑옷 무기 보조병력 등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기사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용병 전성기는 12~15세기였다. 스위스 용병, 독일 ‘란츠크네히트’, 이탈리아 ‘콘도티에리’ 등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돈이 목적이었던 용병끼리의 전투는 ‘싸우는 척’ 할 때가 많았다. 스위스 용병이 후손의 일자리를 걱정해 ‘전원 전사’를 불사한 게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이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소속감 없는 용병 대신 국민병(國民兵)을 최선으로 꼽았다.

16세기 이후 절대군주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상비군을 선호했다. 이것이 국민개병제로 확대된 계기가 프랑스혁명(1789년)이다. 나폴레옹은 무려 300만 명을 징집했다. 총력전을 벌인 1, 2차 세계대전에 이어 냉전시대에도 징병제는 계속 유지됐다. 그러나 1990년대 초 공산권이 붕괴한 뒤 유럽에선 44개국 중 24개국이 모병제로 돌아섰다.

그런 유럽에서 징병제가 되살아나고 있다. 우크라이나(2014년), 리투아니아(2015년), 노르웨이(2016년)에 이어 올초 스웨덴도 8년 만에 징병제를 부활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여성도 징병대상이다. 프랑스도 18~21세 남녀의 단기(1개월) 군사훈련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과 불가리아도 검토 중이란 소식이다. 주된 원인은 안보 우려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무력 병합(2012년) 후 징병제 전환이 뚜렷하다. 점증하는 테러와 난민 문제가 있고, 청년실업도 고려 대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징병제가 무척 예민한 이슈다. 안보 위협, 병역자원 감소에다 ‘남성 독박’ 반발까지 뒤엉켜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달라 징병제와 모병제의 정답은 없다. 다만 징병제 국가라면 군대 처우 개선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