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서 밀렸던 가와사키중공업, 중국 CRRC 제쳐
지하철 최대 1612량 수출
계약이행 능력·품질서 높은 평가
아베 인프라 수출 지원도 한몫
일각선 "미국, 중국 급성장 견제 의도"
[ 김동욱 기자 ]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이 미국 뉴욕시에 4조원대 규모의 차세대 지하철 차량(사진)을 공급한다. 글로벌 인프라 수출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과 수주 경쟁을 벌여온 일본이 오랜만에 따낸 대규모 승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인프라 수출사업을 독려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지하철 1600량 공급
20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가와사키중공업은 뉴욕시 교통국(NYCT)과 차세대 지하철 차량을 최대 1612량까지 수출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다. 수주 총액은 약 4000억엔(약 3조8617억원)으로 가와사키중공업 창사 이래 최대 규모다.
뉴욕 지하철에 공급되는 가와사키중공업의 지하철은 ‘R211’이라는 신형 차량이다. 출입문 폭을 넓히는 등 승객 편의성을 높인 제품이다. 2020년 500량을 납품하는 것으로 시작해 옵션 계약에 따라 추가로 1100량가량을 생산·공급할 수 있다.
뉴욕 지하철은 승객이 꾸준히 증가한 반면 차량과 운행 시스템의 노후화로 지연 운행과 크고 작은 운행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NYCT가 이번 신규 차량 발주 때 가격보다는 계약이행 능력과 차량 품질을 중시한 배경이다.
니혼게이자이를 비롯한 일본 언론은 “뉴욕 지하철 사업에서 일본 기업이 북미와 동남아시아 시장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중국 최대 철도차량 제조업체 중궈중처(CRRC)와의 수주 경쟁에서 승리했다”며 환호했다. 이어 “비용면에선 중국 업체에 열세였지만 지금까지 공급 실적이나 납기 완수 및 품질 등의 관리능력을 높게 평가받았다”고 분석했다. 또 NYCT가 CRRC 등의 납기지연 문제 등을 이유로 지난해 가을부터 가와사키중공업으로 협상창구를 단일화했다고 전했다.
가와사키중공업은 1982년 뉴욕 지하철용 차량을 생산한 이래 지금까지 2200량 이상 납품했다. 뉴욕 지하철 차량의 30%가량이 가와사키 제품이다.
일각에선 철도차량 시장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측 고려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가와사키중공업이 미국 내 공장에서 주요 차량 생산에 나서기로 한 점도 미국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했다는 설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 공장을 짓거나 생산을 늘려 일자리를 창출해 달라고 외국 기업에 촉구해왔다.
◆탄력받는 일본 인프라 수출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진행 중인 일본에서는 지하철 신규 노선 건설 수요가 거의 없어 지하철 차량 수요도 둔화하고 있다. 일본 철도차량 제조업체들은 해외 수주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가와사키중공업은 수출을 강화해 철도차량 부문 매출을 2025년에 2016년 대비 75% 증가한 2400억엔(약 2조3170억원) 수준으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히타치제작소도 지난해 10월부터 영국 주요 도시 간 고속철도 영업운전을 시작해 앞으로 총 866량의 차량을 차례대로 공급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철도차량을 포함한 인프라 수출 지원에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등 세계 각국 정상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고속철인 신칸센을 탑승하는 일정을 마련하는 등 해외 고속철사업 수주를 지원해왔다. 지난해 12월엔 폴란드에 차세대 원자로인 ‘고온 가스로’를 수출하는 계약을 맺도록 지원했다. 인도와는 ‘일·인 원자력 협정’을 맺고 원전 설비를 수출할 수 있는 길을 텄다.
더 나아가 일본 정부는 대립관계인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에너지·교통 관련 인프라 수출을 시도하고 있다. 아베 총리 등 주요 정치권 인사들이 잇따라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 참여 의사를 밝히는 등 인프라 수출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