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시댁에 가서 앞으로 제가 시댁에 안올거라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추석에 시댁에 내려가지 않았죠. 최고의 추석을 보냈어요."
선우빈 감독의 최초 '리얼 고부갈등'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가 개봉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있다.
"'아들의 정신나간 부인(my son's crazy wife)'이라는 제목이 솔직히 마음에 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시어머니와 싸울때 '이럴 바에는 안보고 사는게 낫겠다'고 하시길래 "네, 그 말씀 꼭 지키세요'라고 맞받아쳤거든요. 그때 시아버지 입장에서는 '얘가 미쳤구나'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며느리'라는 말도 시어머니가 부르는 호칭이니까 어머니 입장에서는 괜찮은 타이틀인 것 같아요."
선 감독의 부인인 'B급 며느리' 주연 김진영 씨는 시어머니로부터는 'F급 며느리'로 강등당한 상태다.
명문대에 다니며 사법고시 1차 패스하고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였지만 학교선배인 선 감독을 만나 진로를 고민하다 공부를 접었고 2011년 12월 결혼했다.
늘 다정하게 대해주실 것 같았던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아이문제를 비롯해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시어머니와 이에 '절대 질 수 없었던' 김 씨와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딸만 넷인 저희 집에서는 살면서 여자라서 불편한 게 전혀 없었거든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히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렇게 살다가 막상 결혼해 보고 깜짝 놀랐죠. 시어머니께서는 결혼 전 편하게 이름을 부르던 시동생에게 깍듯이 '도련님'이라 부르고 존댓말 하라고 하시는 거에요. 도련님이라니...굴욕적이잖아요. 당연히 싫다고 했죠. 설겆이는 왜 며느리가 해야하나요? 가족 전부 손발 멀쩡한데. 결혼을 결심할 때 이 남자와는 대화를 통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시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제가 힘든걸 이해해주지 못하는 걸 보고 '내가 사람을 잘못 봤자. 결혼을 잘못했다' 억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김진영 씨를 힘들게 하고 'B급 며느리'로 만든 사람은 시어머니일까?
"'B급 며느리' 내용이 고부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사실 가장 힘든 건 남편과의 갈등이었어요. 엄마가 행복해야 가장 가까이에서 영향을 받는 아이도 행복한 건데 제가 시어머니 문제로 남편과 자주 싸우니까 아이도 영향을 받더라구요. 아무리 결혼이 공중에 있던 연애를 땅으로 끌고 내려오는 과정이라고 해도 저는 낙하산을 타고 서서히 내려오고 싶었는데... 시어머니와 갈등 구조가 만들어지는 순간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 원망으로 시어머니가 더 미워졌던 것 같아요. 자기에게 그렇게 소중한 아들의 행복이 제 손에 달려있단 걸 왜 모르시죠?(웃음)"
결혼한지 2년이 되던 해 고부간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고 김진영 씨는 앞으로 시댁에 가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시어머니와 싸우다가 '너랑 나랑 보지말고 살자'고 하시길래 '저도 오기 싫은거 억지로 오는거다. 이제 다시는 안오겠다' 했어요. 그리고 2년간 단 한 번도 가지 않았죠. 영화 'B급 며느리' 장면 중 '짜증나!'하고 악을 쓰는 장면이 있는데 그땐 정말 제가 지옥에 빠진 느낌이었어요. 내가 뭘 해도 여기서 못벗어나는구나 생각드니까 집이 감옥같고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죠. 카메라 감독은 이날 촬영을 접고 돌아가다가 우연히 이 장면을 밖에서 찍게 됐대요."
남편이 자신과 시어머니의 내밀한 일상모습이 담긴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걱정되는 점은 없었을까.
"이전에도 남편이 독립영화를 만든 걸 여러번 봤어요. 영화제 같은데서 한 두 번 상영하고 곧 잊혀지잖아요. 독립영화가 대중을 만나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신경 안썼고 곧 묻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알려져서 부담스러워요(웃음). 영화를 보신 분들이 '통쾌하다'고 박수치는 걸 보니 놀라고 안타까웠어요. 전 이시대 여성을 대변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지는 게 싫어서 덤비고 싸운 것 뿐인데 이정도 성질부리는 것도 다들 못하고 사는구나 싶어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울면서 뱉은 말 중 '결혼 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이 말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이 꽤 많더라구요."
자신이 페미니스트로 대변되는 데도 손사래를 쳤다.
"일부 관객들은 페미니즘을 'B급 며느리' 영화와 연관지으시는데 아예 상관없는 건 아니지만 그 프레임에 갇히는 건 싫어요. 가족 구성원들의 역할이나 기능을 규정짓고 그에 따르라고 강요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보통의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는 이제 우리집 사람이고 시댁 대소사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이런 규정된 가족제도를 문제삼은 것이지 여자니까 잘해줘라 이런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우빈 감독 자신이 겪고 있는 고충을 소위 '팔아먹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아내와 어머니가 너무 싸우니까 둘의 싸움장면을 찍어서 보여주자 생각했어요. 영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면 좀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주위에 얘기하니까 재미있다고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떠냐 하더라구요. 평범한 일상을 담고 싶었지만 카메라가 앞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의식이 되잖아요. 아내가 이렇게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놀랐습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하는 성격이라 더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반면 저희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는 1년 정도 걸렸어요. 가정사가 드러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시니까요. 며느리가 명절에 시댁에 오지 않아도 '공무원 시험 준비중이다',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둘러대셨던 분이거든요. 카메라만 들이대면 화목한 가정으로 연기를 하시더라구요(웃음)"
선 감독은 "서로 치열한 전쟁을 치른 끝에 지킬 선은 지키는 단계가 됐어요. 관리가 되지만 서로서로 조심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까요? 주위 분들은 이 정도면 잘 사는거다 라고들 하시네요"라며 현재 상태를 설명했다.
'B급 며느리'는 선 감독이 최초로 상영관에서 선보이는 영화다.
"제가 만든 영화를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는데 영화제에서 질문하다 울먹이는 분, 그에 답하다 덩달아 눈물 글썽이는 아내를 보며 '아 여자들끼리는 그들만이 아는 공감대가 있구나. 'B급 며느리'는 이제 내 영화가 아니고 저 사람들의 영화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선 감독은 'B급 며느리' 최종판이 완성되는 동안의 에피소드도 전했다. 촬영은 2013년부터 약 1년간 진행됐으며 편집도 여러 과정을 거쳤다.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면 누가 알까 생각해서 나레이션을 많이 했더니 복잡하더라구요. 모의 상영에서 툭툭 키워드만 던져줘도 30~40대 여성분들이 100% 이해를 하는 걸 보고 내용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리드미컬하게 편집했습니다. 심리 상담 받는데 제가 겪는 이 전쟁같은 일상이 '평범한 고부갈등'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말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됐습니다. 전국 기혼자들이 영화 'B급 며느리'를 보시고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생각하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겪어보니 '나도 힘드니까 며느리인 네가 어머니한테 좀 맞춰라' 하면서 그때 순간을 대충 넘기며 우유부단하게 있으면 상황이 더욱 악화되더라구요. 적극적으로 들이받고 바꾼 끝에 이제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키게 됐죠. 어느 정도 긴장감 있는 평화가 찾아왔다고나 할까요."
"유명한 감독 부인되는거? 난 필요없어. 그건 내 꿈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김진영 씨.
그의 꿈은 과연 무엇일까.
"남들이 제 인생을 들여다보게 된 지금에서야 오히려 제가 제 자신을 잊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판검사가 되길 바라는 부모님 뜻을 따르려고 기계처럼 공부만 했고 내 인생을 찾겠다고 공부를 그만둔 순간 임신했어요. 내가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지 못한 건 부모님 강요 때문이라고 원망도 했었지만 그 과정 모두가 내 선택이었으니 남 탓하지 말고 내 인생 만족하고 책임지고 살거에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도 김진영 씨는 용납하지 않는다.
"남편은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아니에요. 남편도 당사자니까 적극적으로 같이 문제를 풀어야죠.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래도 좀 참아. 엄마는 옛날 사람이잖아. 못바꾼다고'하면서 방치하는건 남편이 고부갈등의 가해자가 되는 거란걸 모든 남편들이 알았으면 해요."
영화 'B급 며느리'는 오는 17일 개봉 예정이다. 독립영화가 대형 배급사를 포함해 전국 100여 곳 상영관에서 개봉 초반 관객들을 만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
/ 사진 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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