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조직 더 커지나
치안기능에 국내 정보수집까지
더 강력한 정보기관 출현 우려
견제장치 등 조직 개편 과제로
안보수사 제대로 할까
대공수사 전문·연속성 떨어져
인력 보강 등 역량 확충 방침
인권침해 막고 중립성 확보 관심
자치경찰제, 검·경 수사권 조정 등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풀어야
[ 성수영 기자 ]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보따리 하나 터진 거로 소란 떨 거 있네? 태우라우.”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에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김윤석 분)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시위 주동자 은닉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사인은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 박 처장은 별일 아닌 듯 태연하게 시신을 화장하라고 지시한다.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이 영화가 최근 흥행에 성공하면서 경찰의 ‘흑역사’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이철성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가 잇따라 영화를 관람한 데 이어 13일 박종철기념관을 방문해 추모 헌화할 예정이다. 때마침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한다는 정부 결정이 나오면서 경찰은 이제 ‘안보’와 ‘인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유일한 국내 정보수집 기관
정부는 국정원 대공수사권 이관을 추진하면서 당초 안보수사청을 신설하거나 법무부·총리실 산하에 안보수사국을 설치하는 방안 등 여러 대안을 고려했다. 아직 국회 문턱이 남았지만 결국 승자는 경찰로 굳어지는 모습이다.
대공수사권이 이관되면 경찰은 국내 정보수집 기능을 보유한 유일한 정부 기관이 된다. 지금까지는 국정원과 경찰이 각각 국내 정보를 수집하면서 서로 경쟁과 협력 관계에 있었다. 실제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7년 7월 말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749건 중 531건(71%)을 경찰이 맡았고 187건(25%)을 국정원이 담당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무게추가 경찰로 확 쏠리게 된다. 국정원의 한 직원은 “백보 양보해 대공수사권을 다른 기관에 넘긴다고 해도, 왜 경찰이 다 가져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공수사권 이관을 명분으로 경찰 조직이 비대화될 가능성도 높다. 이 청장은 지난 9일 “향후 보안경과제를 강화하고 전문수사인력을 충원하는 등 안보수사 역량을 대폭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을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장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찰 측이 외부 통제기구인 ‘옴부즈맨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사후약방문’이나 ‘제식구 감싸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걱정이다. 국회 감사원 언론사 등 독립성을 갖춘 외부기관 산하에 실질적으로 경찰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대공수사 전문인력·노하우 없는데…
안보 전문가들은 대공수사권 이관 과정에서 안보수사 공백이 생길 공산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기기로 결정한 서훈 국정원장조차 지난해 5월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대공수사를 가장 잘할 기관은 국정원”이라며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민간인 사찰 행위를 없애야지 대공 수사력이 약화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간첩, 반국가단체 구성, 반국가목적행위 등 ‘3대 안보 위해사건’은 총 56건으로 이들 사건 대부분을 국정원이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선 경찰들은 일부 부서를 제외하면 대공수사 업무에서 손을 뗀 지 오래다. 탈북자 관리나 경호·경계 업무 등이 고작이다. 대공수사에 필요한 수단도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다. 서울의 한 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감청 등 수사에 필요한 영장을 확보하는 절차가 국정원에 비해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고 설명했다.
‘인권경찰’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대공수사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청장은 “경찰권 남용 방지와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해 시민대표로 이뤄진 경찰위원회가 경찰행정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한 정보과 형사는 “대공수사까지 경찰위원회의 통제를 받는다면 기밀이 새어나갈 우려가 있고, 정치적 중립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우려했다.
경찰은 안보수사 공백 우려를 최소화할 방안을 고심 중이다. 경찰청은 이에 따라 기존 경찰청 보안국을 확대 개편하고 전문수사인력을 확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청 관계자는 “국정원의 숙련된 인력을 수혈받는 등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며 “입법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계 부처 등과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자치경찰제, 검·경 수사권 조정과도 연계
대공수사권 이관이 자치경찰제 시행이나 검·경 수사권 조정과도 긴밀하게 얽혀 있어 실제 추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대공수사권을 이관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자치경찰제 시행을 내걸었다. 이에 따라 경찰개혁위원회는 2019년까지 국가안보 및 공안 범죄·전국단위 범죄·국제범죄 등을 다루는 국가경찰과 민생치안을 담당하는 자치경찰을 분리하는 방안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면서 제동이 걸렸다. 반년 넘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표류 중인 검·경 수사권 조정도 자치경찰제 시행의 핵심 변수다.
수사권이 조정되지 않은 채 자치경찰이 시행되면 자치경찰을 통솔하는 자치단체장이 검찰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지난 11일 수사권 조정에 대해 “자치경찰제 강화 등이 전제돼야 할 것”이라고 못을 박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경찰 수뇌부만의 의지로 이처럼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한 경찰청 고위간부는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나온 게 없어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시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각 관련 기관들이 ‘부처이기주의’를 버리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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