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조 '화유기' 사태 기자회견, "튼튼하다"던 천장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입력 2018-01-04 18:09
수정 2018-01-05 09:12
'화유기' 제작 현장 추락 사고 대책 수립 촉구 기자 회견
언론노조 "드라마 현장, 노동법 사각지대…정부, 즉각 실태조사 해야"



나무로 만들어진 사다리를 타고 목조 구조틀 위에 놓인 합판에 오른다. 어떤 이들에겐 일상이라고 한다. 보고 있는 이들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고작 합판과 목재 몇개가 사람의 하중을 버틸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지난해 12월23일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에 위치한 tvN '화유기' 세트장에서 MBC 아트 소속의 스태프가 천장에 조명을 달다 추락사고를 당해 허리뼈와 골반뼈 등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이번 사고는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세트 설치가 늦어지면서 새벽까지 작업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오전부터 새벽 1시까지 작업해서 피로도가 누적된 상태였죠. 현장에선 '그걸 꼭 오늘 해야겠느냐'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결국 사람의 하중을 견딜 수 없는 자제로 시공된 곳에 올라가서 작업하다 사고가 났습니다."

4일 서울 중구 서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회의실에서 열린 드라마 '화유기' 제작 현장 추락 사고 대책 수립 촉구 기자회견에서 사고 피해자 측은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피해자는 JS 픽처스 이철호 미술감독의 요청에 따라 '비밀의 방' 세트 내 샹들리에 전선 연결 작업을 위해 세트 천장으로 올라갔다. 팀원들은 천장 아래에서 샹들리에 고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천장위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천장을 이루고 있던 목각재가 파손됐다. 안정장치는 없었다. 그는 엉덩이 부분부터 V자형태로 추락했다. 이때 척추와 머리에 큰 충격이 발생했고 팀원이 119에 사고 접수해 구급대원들이 응급조치 후 병원으로 이송했다. 사고 당시 미술감독은 현장 내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피해자는 척추골절로 인한 하반신 마비, 두부 충격으로 인한 두개강 내 뇌출혈 증상을 입고 수술 후 회복 중이다. 의식은 회복했지만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노조가 지적한 첫 번째 사고 원인은 제대로 된 설계도면 없이 부실한 자재로 시공된 환경이다. 세트를 설치한 라온 대표는 "화유기 세트장이 다른 세트장에 비해 튼튼하게 설치됐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다른 관계자는 "원래 라왕이라는 자재를 썼는데 예산이 줄어들면서 대체 자제를 써야했다. 스프러스라는 40% 정도 저렴한 자재를 썼다. 강도가 약하다. 옹이가 많아 금방 부러질 수 있는 것이 단점"이라고 말했다. 인테리어 업체 취재에 따르면 이 자제는 사람의 하중을 견디기 힘들며 잘 구부러지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스태프들은 철자재로 만들어진 사다리 대신 목자재로 만들어진 사다리를 탔다. 현장 감독을 했던 산업재해예방안전보건공단 감독관도 이를 지적했다. 공개된 영상에서 "사람이 밟아 무너질 정도면 안전한 것은 아니다", "튼튼해 보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약한 부분이 있다. 철로 된 것을 사용해라. 권고사항이 아니라 강력하게 요청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을'의 '을' 입장에선 안전장치에 대한 요구는 배부른 소리였다. 사고를 목격한 A씨는 "우리 촬영장 뿐만 아니라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다. 인건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감독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한다. 시간도 없기 때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다"라고 토로했다.


피해자와 A씨는 현장 일선에서 가장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소도구 담당팀이다. 사고 전 생방송과 다름 없는 촬영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새벽 4시까지 작업을 하며 장시간 노동에 내몰렸다. 특히 소도구 업무 담당이지만 사고 당일엔 전기 연결 업무를 했다.

김종찬 MBC아트 지부장은 "이번 사고는 제작비 절감 차원의 쪼개기 발주 등에 주된 원인이 있다. 전기기사 자격증을 보유하지 않은 공정이 전혀 다른 정식 업무에 대하여 발주 절차를 무시하고 갑을 관계를 이용해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고 판단이 된다"라고 밝혔다.

현행 전기공사법 제3조 1항에 따르면 전기공사는 공사업자가 아니면 도급을 받거나 시공할 수 없다. 하지만 제작사는 별도의 전기기술자에 위탁하지 않고 소도구 담당자에게 업무를 '지시'했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전기공사는 위험요소가 많고 안전 설비를 갖춘 후 진행해야 하는 만큼 전기공사업법을 관장하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관할 지자체가 조사 및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유기'에 이같은 사고가 벌어지고 제작환경 개선을 촉구했으나 제작사 측은 새 PD만을 투입했다. 언론노조는 "충분한 안전대책,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작업이 중지됐으면 좋겠다고 밝히고 있다. PD 한 명 인력 보강 소식을 듣고 당혹스럽고 분노하기도 했다. 현재 제작을 강행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로서는 유감이다. 적정 인력 확보, 휴식 시간 보장, 안전 사항 보장 등을 확인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2016년 '혼술남녀' 연출부 故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 씨가 참석해 '화유기'를 방송하고 있는 tvN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 씨는 "처음 '화유기' 소식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지난해 6월 저희는 관련자를 처벌하기보다 방송사에서 큰 책임을 지고 이한빛 PD 이후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주요한 해결책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CJ E&M이 구조 개선안을 발표하고 신뢰 또한 보였다. 가족의 죽음을 걸고 가해자들과 협상을 했다. 이런 구조가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당사자들의 노력 또한 신뢰했다"라고 설명했다.

이한솔 씨는 CJ E&M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고 밝혔다. 그는 "좌절 보다는 희망을 주고자 했던 우리의 움직임이 부끄러운 결과물로 돌아오는 마음이 들게 됐다. 문화를 바꾸는 것을 넘어서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현장의 분위기를 좋게 할 수 있는 부분은 방송사와 경영자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결단들이 시행이 된다면 문화들이 바뀔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저희와 약속했던 말들에 책임을 지고 구체적인 시행안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 또한 "지난해 CJ E&M은 방송 제작 환경과 문화 개선을 약속했다. 말로만 립서비스 하는 것이 아닌가 지켜봤다.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한다. 공중파를 제외하고 CJ E&M은 가장 큰 방송사이기에 그만큼 사회적 책임도 크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희는 협상 주체가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지원, 보상은 그 자체로 충실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CJ E&M이이 문제에 대해 잘 대처하고 있는지 지켜보겠다.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즉시 의견과 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노조는 "드라마 방송 제작 현장은 늘 노동법의 예외 지대처럼 여겨졌다. 관행, 업계의 특수성만 강조됐다. 노동법의 사각지대가 노동인권이 보장되는 환경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정부는 제작 중인 모든 드라마 현장에 대한 긴급 실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는 40대 후반의 아이 둘을 둔 평범한 가장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가 현장에 복귀해 일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사고 당일 해당 업무를 지시했던 미술감독은 지난 2일까지 촬영장에 출근했다. 동료의 사고 후에도 촬영장에서 일해야 했던 MBC아트 직원들이 제작사 측에 '함께 일하는 것이 힘들다'라고 전달했다. 3일부터 미술감독은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빠지겠다는 것이 공식입장이라고 MBC아트 사무국 측은 설명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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