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발렌타인 데이', 바닥이 열리고 그네가 내려오고… 처연한 사랑 무대장치로 그리다

입력 2018-01-02 17:11
수정 2018-01-03 09:09
[ 마지혜 기자 ]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러시아 연극의 ‘오늘’을 느낄 수 있는 무대다. 모스크바 프락티카극장 예술감독이면서 러시아 최고의 연극상으로 불리는 황금마스크상과 독일 최고극작가상 등을 받은 이반 비리파예프(44)가 2009년 발표한 희곡이 원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예술원에서 연출을 전공한 김종원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번역하고 연출했다.

두 여인 발렌티나와 까쨔, 그리고 이들이 젊은 날 동시에 사랑한 남자 발렌틴이 주인공이다. 18세에 발렌틴과 발렌티나는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발렌티나 부모의 반대와 발렌틴을 짝사랑한 까쨔의 속임수로 두 연인의 사랑은 이어지지 못한다. 발렌틴은 사랑을 고백한 까쨔와 결혼한다. 15년이 흐른 뒤 우연히 만난 발렌틴과 발렌티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발렌틴은 다시 만난 사랑에 온 몸을 던지지도 못하고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도 못하며 괴로워한다. 이 관계 속에서 발렌틴과 발렌티나, 까쨔 모두가 고통받는다. 결국 발렌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발렌티나는 평생 발렌틴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산다.

국내에 모처럼 선보인 러시아 동시대 연극은 철저히 사랑 얘기다. 아름답다기보다 슬프고 처연한 사랑이다. 때로는 악다구니 같은 사랑이다. 놓친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상대를 억지로 끌어안고 관계를 유지해보려 애쓰는 처절함 등의 감정이 극에 농밀하게 녹아 있다. 연극계에서 뼈가 굵은 배우들이 무대를 장악한다. 배우 이명행과 정재은이 발렌틴과 발렌티나를 맡고 이봉련이 까쨔를 연기한다.

연극만의 미학이 살아있다. ‘연극답다’는 인상을 준다. 40여 년을 넘는 시간을 담고 있는 극 내용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발렌티나의 의식을 따라 전개된다. 과거 사건이 현재로 소환되고 등장인물들은 현실을 배경으로 과거와 전쟁한다. 눈이나 낙엽 등 계절적 소품을 풍성히 활용하고, 무대 바닥이 열리거나 천장에서 그네가 내려오는 등 무대장치를 적극 활용한다.

김종원 연출은 “이 작품은 사랑이 전부고 그 사랑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며 “관객들이 이 작품으로 비논리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극 중 발렌티나가 마지막으로 하는 대사는 이런 주제의식을 함축한다. “사랑엔 규칙이 있고, 규칙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또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멋진 어느 날, 사람들에게 사랑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랑이 생긴 겁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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