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환희의 송가' 노랫말처럼
서로 뜨거운 가슴 나누는 연말이 되기를
이경재 < 서울시 오페라단 단장 >
연말이면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곡이 있다. 헨델의 ‘메시아’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가 유명하다. 거대한 오케스트라 편성과 합창단을 통한 익숙한 멜로디뿐 아니라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182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환희의 송가’가 지휘자 미카엘 움라우프와 베토벤의 지휘로 초연됐다. 작품의 지휘자가 두 명이라고? 우리에게 베토벤 ‘합창 교향곡’으로 잘 알려진 이 작품의 초연 당시 이야기다. 당시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이 작품이 초연되기 2년 전, 자신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지휘하던 베토벤을 지켜보던 음악감독 움라우프는 그가 청력을 잃어감에 따라 공연 리허설이 엉망이 되고 있었음을 지켜봐 왔다. 이 때문에 빈 초연 무대의 지휘단에는 베토벤이 섰지만 실제로는 움라우프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한 것이다.
당시 함께 연주했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베토벤을 “자신이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합창을 모두 노래하려는 듯 격정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곡이 끝나고 관객의 갈채가 쏟아질 때도 심취한 베토벤은 아직 몇 마디를 더 지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관객은 이례적인 5회의 기립박수로 악성 베토벤의 음악에 존경과 감동을 표현했다. 알토 솔로이스트가 베토벤에게 다가가 관객들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한 뒤에야 베토벤은 찬사에 휩싸일 수 있었다.
교향곡이라고 하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기악음악을 말한다. 그런데 ‘환희의 송가’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독창자와 함께 합창단이 등장한다. 교향곡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전 시대를 보면 악기와 노래가 함께 있는 구조는 여러모로 찾아볼 수 있다. 오페라 무대야 말할 것도 없고 헨델의 ‘메시아’처럼 바로크 시대부터 유행하던 오라토리오 역시 오케스트라와 독창자, 합창단이 한 무대에서 연주했다. 어쩌면 교향곡에 합창단이 등장한다는 사실만 빼면 그리 어색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을 가장 아름다운 악기인 인간의 목소리로도 함께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대의 계몽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들을 젊은 시절부터 접한 베토벤은 시인이 얘기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인간이 신이 주신 자연 안에서 형제애로 하나가 되는 기쁨을 노래하고 싶었다. 평등한 세상에서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소리를 찾고 싶었다.
4악장으로 이뤄진 이 교향곡의 백미는 마지막 18분여 동안 나오는 음악이다. 저음 현악기들이 모두 함께 노래할 수 있는 기쁨의 선율을 찾는다. 오케스트라 속 악기들이 각자 자신의 소리를 내며 불협화음을 내지만, 곧 단순하고 아름다운 주요 선율을 찾아내 저음부의 더블베이스로부터 시작해 차례로 악기를 옮겨가며 연주한다. 먼저 주요 선율을 연주했던 악기는 다른 악기가 연주할 때 선율의 아래로 내려가며 음악을 지지해 준다. 그리고 모든 악기가 그들이 발견한 함께 누리는 기쁨의 선율을 힘차게 연주한다. 그러고 나면 이 음악을 완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악기, 인간의 목소리가 이들과 함께 노래한다. “… 모든 피조물들은 자연의 품 안에서 기쁨을 누리자 … 영광스런 천체를 많은 태양들이 선회하듯 형제들아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그리고 영웅들이 그러하듯 서로의 손을 마주 잡자. 억만의 인류가 서로 감싸 안자. 우리의 입맞춤을 세상과 나누자….”
겨울이 춥다. 뜨거운 가슴을 주변과 나누는 연말이 됐으면 좋겠다. 귀머거리 베토벤도 우리와 나누고 있었다.
이경재 < 서울시 오페라단 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