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경제민주화는 119조 2항만으로도 충분
현행 헌법은 30년간 그대로인 낡은 헌법
전직 대통령들의 비극, 제도 문제라는 방증
[ 서정환/박종필 기자 ]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정치권은 당리당략으로 접근하고 겉으로만 개헌을 외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지난 25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이번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을 위한 개헌에 나서야 한다. 지금 헌법은 만 30년 이상 단 한 줄도 고쳐지지 않은 낡은 헌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재임 때 국회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를 1년간 운영하고 2009년 8월 개헌연구 보고서를 발표할 정도로 대표적인 개헌론자다. 개헌 필요성에 대해 “대통령제 헌법 하에서 6명의 전직 대통령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것은 제도는 고치지 않고 법 운용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방증”이라며 “이제는 권력구조 측면에서도 헌법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정치권에서 논의 중인 개헌 방향과 관련해 “사유재산권과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활동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장경제 원칙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 등 경제 전반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들 수 있는 논의는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은 제헌 70주년입니다.
“그동안 우리 헌법만큼 우여곡절을 거친 헌법도 드물 것입니다. 우리 헌정사는 피로 얼룩진 때도 많았습니다. 국민보다 권력에 의한 개헌이었고, 그러다 보니 권력구조 변경이 개헌의 ‘시종’이 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 헌법은 만 30년 이상 단 한 줄도 고쳐지지 않은 최장수 헌법입니다. 1948년부터 1987년까지 39년간 아홉 번 바뀌었으니까 (그 전까지는) 헌법 수명이 4.5년 정도였죠.”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활발합니다.
“87년 헌법 체제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해 6명의 대통령이 모두 비극적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국가의 불행이기도 합니다. 당선 때는 모두 좋은 대통령,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감방에 가거나 자식이나 형제가 가거나, 아니면 바위에서 뛰어내리거나…. 모두 실패했다는 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라는 방증입니다. 지금 헌법상 대통령제의 한계입니다.”
▷권력구조 개편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제왕적’이라고 일컫는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분산시키고,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합리적·제도적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각 영역에서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반드시 부과하는 개헌이 돼야 합니다. 권한은 조정하고 책임을 갖게 하는 것이 개헌의 방향이어야 합니다.”
▷대통령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현행 헌법 하에서 3권 분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첫째 입법부는 법을 만드는 곳인데 입법부와 행정부가 지금 입법권을 나눠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행정부가 자기 쓸 돈을 자기가 편성해서 ‘국회는 심의만 하라’는 식입니다. 세 번째로 공무원에 대한 감독권을 정부가 행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법부 수장인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대법원장 등의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고 있습니다. 3권 분립은 형식적입니다.”
▷개선해야 할 제왕적 대통령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국민이 피부로 공권력이라고 느끼는 경찰, 검찰, 국세청, 국가정보원, 감사원, 방송통신위원회 등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들 기관을 대통령의 권한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국가기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헌법 체제로 가야 합니다. 일부는 어쩔 수 없이 국회로 갈 수밖에 없지만 많은 권한을 독립된 행정기관에 둬야 합니다. 국세청장 경찰청장 검찰총장 등은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해서는 안 되고 임기를 보장해야 합니다. 권력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충성하는 기관이 되도록 헌법에 보장해야 합니다. 그게 ‘21세기 개헌’의 핵심입니다.”
▷국회 개헌특위에선 ‘경제민주화 조항 강화’ ‘토지 공개념’ 등을 넣을지 논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경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현재 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더 구체적인 것은 관련 법령으로 하면 됩니다. 헌법은 규범법입니다. 책임성 윤리규정만 얘기하면 됩니다.”
▷개헌 논의를 보면 사회주의적 요소가 반영될 것이란 우려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자세, 이것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봅니다. 바뀌어서도 안 되고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기반을 위협하거나 뒤흔들 수 있는 조항을 이참에 집어넣자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로 성공했는데 사회주의로 가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성공한 제도를 놔두고 실패한 제도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도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했는데 거꾸로 가겠다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죠.”
▷개헌 논의가 매번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대 대통령과 정당은 선거 때마다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만 되면 입을 싹 닫았죠. 집권 초반에는 국정 운영에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후반기에 개헌하자고 나서면 야당이 ‘정치공작이다’ ‘물타기다’ 이런 식으로 뒤엎어버렸습니다. 개헌을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고 정략적으로 개헌을 안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역대 정당과 대통령은 다 공통의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번은 잘 될 수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두 번이나 공식적으로 개헌을 말한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식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개헌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개헌의 암초는 대통령이었고 두 번째가 여당, 세 번째가 야당이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동시 투표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방선거 때 개헌 투표를 하면 손해다, 정권심판이 빛을 못 본다는 정략적인 계산 때문입니다. 제발 야당이 꿈을 깼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은 다 압니다. 여당도 이걸(야당 반대로 개헌을 못 했다는 걸) 선전하고 나설 겁니다. 개헌만큼은 당리당략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헌과 연계해 선거구 개편도 뜨거운 이슈입니다.
“선거구제도 개편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도시 집중화가 이뤄진 나라가 없습니다. 소선거구제를 하다 보니 서울, 부산만 보더라도 ‘내셔널어셈블리’, 즉 ‘국’회의원을 뽑아야 하는데 ‘동’회의원을 뽑습니다. 이렇게 좁은 선거구를 갖고 있는 국회의원은 (세계에서) 드뭅니다. 동회의원으론 국회 일이 안 됩니다. 그래서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주장이 나오는데 저는 반대합니다. 비례대표의 역할과 기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1947년 경남 고성 출생
△경남고,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1986년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1990년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제14·15·16·17·18대 국회의원
△2008년 18대 국회 전반기 의장
△2013년 부산대 사회과학연구원 석좌교수
서정환/박종필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