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투명경영 가로막는 '사외이사 패싱'

입력 2017-12-21 18:29
사외이사·감사위원의 생명은 전문성·독립성
대주주와 유착 막고 비전문가 선임은 차단하고
경영감시 책임 방기할 땐 엄중히 책임 물어야

이만우 < 고려대 교수·경영학 leemm@korea.ac.kr >


반도체 호황을 과신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앞세워 자본시장 개방을 서둘렀다. 고금리를 노리고 몰려든 외국자본은 반도체가 불황으로 돌아서고 한보·기아 사태로 은행 부실이 노출되자 자금을 거둬들였다. 외화부도에 직면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주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아들였다.

부도덕한 한보와 무책임한 기아는 난장판이었다. 주식회사는 회의체인 이사회가 경영을 맡는 조건으로 주주의 유한책임을 인정하는데, 한보는 대주주 1인 독재체제였고 기아는 허약한 전문경영인이 강성노조에 끌려다녔다. IMF 주도의 기업구조조정은 독립적 사외이사에 의한 경영감시가 핵심이다. 사외이사 중심의 선진적 감사위원회도 도입됐다. 사외이사·감사위원 제도는 전문성과 독립성이 생명이다. 전문성이 없으면 무익한 것으로 끝나지만 독립성이 없으면 부당한 경영권 행사를 방조하는 해악이 된다.

산업은행과 금융위원회가 최대 및 2대 주주인 대우조선의 사외이사·감사위원 리스트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사채 발행과 자금 차입은 이사회 결의사항이다. 대규모 순이익을 계상하고 거액의 성과급과 배당금을 퍼주면서도 차입은 계속 늘렸다. 기본적 회계 상식을 갖춘 인사라면 차입금 증가 사유를 따졌을 것이지만 모두들 그냥 넘겼다. 장기간 사외이사로 재직하면서도 ‘사외이사 역할’을 깎아내리는 자가당착도 눈에 띈다.

감사위원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검찰이 대우조선 외부감사를 맡은 안진회계법인은 엄중하게 기소했고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감사실패를 성토하는 분위기에 맞춰 6년 이상 계속감사를 맡은 경우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를 제외하고는 신규 감사인을 금융위가 지정하도록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이 개정됐다.

회계업계 일부에서는 감사대상회사와 외부감사인 사이의 갑을관계 전환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부정적 감사의견이 표명되면 감사대상회사의 상장이 폐지되는 엄중한 상황에서 회계업계가 스스로를 을(乙)로 비하하는 것은 지나친 자학이다. 감사보수 산정기준인 감사투입시간을 적절히 감독하지 못해 덤핑 수주가 난무했고 일부 대형회계법인이 전직 관료 중심의 용병을 고용해 중소형 일감까지 쓸어간 적폐 때문에 생긴 일이다. 내부감사와 외부감사의 연계를 강화하고 적정 감사투입시간이 지켜지도록 감사위원회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미국은 감사위원의 자격요건으로 ‘재무제표를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전문성(financial literacy)’을 요구하지만 한국에서는 1인의 재무전문가 요건이 전부다. 회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사만 굳이 골라 감사위원회를 구성한 경우도 많다. 감사위원 역할이 강조되는 긍정적 징후도 있다. 삼정KPMG 감사위원회 지원센터가 주관하는 정기적 직무교육에 참여한 감사위원들은 회계투명성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공감하고 개선 방안에 중지를 모으고 있다.

미국 감독당국은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한국 기업의 감사위원회 운영과 외부감사에 대한 통제의 유효성을 정기적으로 점검한다. 지난 주말 한국회계학회에서는 감사위원의 전문성이 높으면 영업보고서 머리말에서 회사 전망을 낙관적으로 부풀리는 현상도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해외 상장법인에 대한 외부감사인을 한국 정부가 지정하는 유례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미국이나 유럽 감독기구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외부감사 감독에 대한 감사위원회 책임을 묻기 어려워진다. 회계법인마다 부실감사로 처벌받은 전과가 쌓였고, 회계감사와 인수합병 자문에 대한 분리가 강제된 상황에서 대형 회계법인 사이의 배정이 쉽지 않다. 외국 감독기구가 직접 지명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면 유럽연합(EU)의 조세피난처 지정과 비슷한 국제적 망신거리가 될 것이다.

감사위원회 활동이 미흡하거나 3인 이상의 사외이사를 확보 못한 경우에는 회계법인 품질관리 강화를 전제로 외부감사인 지정제를 활용해야 한다. 대주주와 유착관계인 비전문가를 눈가림으로 선임하는 ‘사외이사·감사위원 패싱’부터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부적절하게 선임된 인사가 경영감시 책임을 방기(放棄)할 땐 민·형사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이만우 < 고려대 교수·경영학 leemm@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