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예능, 새 시선을 덧대어 호기심을 깨우다

입력 2017-12-15 17:49
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 김희경 기자 ]
“제주도는 가족이랑 여행으로 자주 왔어요. 렌터카를 타고 몇 바퀴 돌아보기도 했는데 이번에 와 보고 내린 결론은 ‘나는 제주도를 모른다’예요.”(가수 유희열)

아름다운 풍경, 맛있는 음식. 많은 사람이 이 매력에 취해 제주도를 즐겨 찾는다. 하지만 tvN의 예능 ‘알쓸신잡 2’를 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유희열의 말처럼 그동안 보고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주도는 상처가 나고 또 아물기를 반복하며 더 아름답고 깊어졌다. 척박한 토양이라 농사를 짓기 힘들었고, 고립된 탓에 기근을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많은 인물이 정쟁에 휘말려 유배를 오기도 했고, 제주 4·3 사건이란 지울 수 없는 아픔도 서려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거상이 돼 가난한 이들까지 끌어안은 김만덕이 탄생한 곳이며, 추사 김정희와 화가 이중섭이란 문화적 자산을 품은 땅이다.

‘알쓸신잡 2’에서 작가 유시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건축가 유현준, 뇌과학자 장동선이 펼치는 이런 내용의 수다를 듣다 보면 제주도라는 거대한 세계가 성큼 걸어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끝엔 스스로에 대한 작은 의구심이 남는다. 같은 공간을 보고도 보지 못했던 것이 단순히 지식의 차이만은 아니지 않을까.

예능 프로그램이 대중의 잠든 호기심을 깨우고 있다. tvN의 ‘알쓸신잡’이나 ‘어쩌다 어른’ 같은 ‘쇼양(예능과 교양을 섞어 놓은 듯한 프로그램)’이나 MBC 에브리원의 ‘어서와~한국은 처음이지?(이하 ‘어서와’)’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새로운 시선을 덧댄다는 것이다. ‘알쓸신잡’과 같은 쇼양엔 각 분야 전문가의 시선이 등장한다.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는 시선의 향연에 하나의 현상과 공간에도 수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서와’에는 매주 다른 나라 외국인들이 등장한다. 우리에겐 그저 평범한 일상이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그들의 눈엔 반짝이는 신비한 순간들로 비친다.

호기심은 본능이다. 《큐리어스》를 쓴 영국 작가 이언 레슬리는 “호기심은 식욕, 성욕, 주거욕 다음 가는 인간의 네 번째 본능”이라며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다른 유인원들과 구별 짓는 가장 큰 차이점을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본능은 유독 한국 사회에서 억눌려 왔다. 국가가 빠른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개인에게도 효율성을 강요해 왔다. 시간과 자원이 들어가는 호기심은 비효율적이며 낭비라고 여겨졌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알쓸신잡’의 풀네임만 봐도 느낄 수 있듯 ‘알아두면 쓸데없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알쓸신잡’이나 ‘어서와’를 보다 보면 그 방법이 생각보다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기심 어린 시선은 ‘관심’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어서와’에서 독일 청년들이 관광 명소가 아니라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간 것을 떠올려보자. 이 장면은 네티즌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후회와 반성의 댓글도 쏟아졌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한번쯤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정작 가본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들여다보려 하지 않은 관심의 차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최근 예능 프로그램들은 대중의 삶 속에 체화돼 버린 호기심의 상실과 생각의 단절을 극복하도록 유도한다.

영국에서는 2010년부터 매년 ‘지루함 콘퍼런스(Boring Conference)’가 열린다. 그냥 스쳐지나갈 법한, 지루함마저 주는 소재들을 다룬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그 강도와 상황을 기록하기도 하고, 길거리 가게의 정면 사진을 찍기도 한다. 버스 노선을 기록하고 각 자판기의 덜컹거리는 소리도 녹음한다. 평범한 일상의 찰나에 자신만의 시선을 덧대는 것이다. 지루해 보여도 매년 이 행사의 티켓은 매진될 만큼 인기가 많다. 더 이상 재밌을 것도, 신기한 것도 없는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는가. 오직 당신의 반짝이는 시선만 있다면 모든 순간이 빛날 수 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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