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퇴직금 분할 약정과 부당이득 반환
(대법원 2010년 5월20일 선고 2007다90760 전원합의체 판결)
이상희 <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
현행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은 기업이 퇴직하는 근로자를 위해 퇴직금(퇴직일시금)이나 퇴직연금을 두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퇴직금은 기업이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특별히 지급하는 임금이기 때문에 근로자의 퇴직 사실이 없으면 퇴직금 지급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 또 퇴직연금을 도입한 곳 외에는 근로자의 퇴직금을 굳이 적립할 의무가 없으며 단지 퇴직 시에 지급하기만 하면 된다. 주택구입 등 목돈이 필요한 근로자는 법에 정해진 요건에 따라 기왕의 근로에 대한 퇴직금 중간정산을 요구할 수 있다. 결국 퇴직금은 근로자 퇴직 시나 중간정산을 할 수 있는 법정요건을 갖춘 경우 외에는 지급의무가 없다.
대법원도 월급에 퇴직금을 미리 분할해 지급하기로 하는 약정은 퇴직금 중간정산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아닌 한 근로자가 최종 퇴직 시 발생하는 퇴직금 청구권을 사전에 포기하는 것으로써 퇴직금 지급의무를 규정한 강행법규에 위배돼 무효라고 해왔다(대법원 2002년 7월26일 선고 2000다27671 판결 등). 따라서 월급에 퇴직금을 분할 지급한다는 약정에 따라 기업이 퇴직금 명목의 금품을 지급했을지라도 그것은 퇴직금 지급으로서의 효력이 없다. 그렇다면 기업이 이미 지급한 퇴직금 명목의 금품은 추후 반환받을 수 있을까. 약정에 따른 퇴직금 지급이 무효라면 반환이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선의로 지급한 기업은 억울할 것이다. 위 전원합의체 판례는 이에 대한 다툼을 명시적으로 확인, 해결한 사례다.
이 사건 대상 기업은 퇴직금을 매월 중간정산해 월급에 포함시켜 지급한다는 보수규정과 연봉계약에 따라 근로자들에게 퇴직금을 매월 분할 지급해 왔다. 1심 판결에서는 장래의 근속에 대한 중간정산은 법률상 허용되지 않아 퇴직금 지급 효력이 없고, 분할 지급된 퇴직금 명목의 금품은 최종 퇴직금 산정의 기초인 임금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퇴직금 분할 약정은 종전처럼 ‘무효’
2심 판결과 상고심인 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결론을 같이 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우선, 퇴직금 분할 약정을 통해 월급으로 지급하는 것은 종전과 같이 무효로 판단했다. 그러나 퇴직금 분할 약정 지급이 무효라면 약정에 의해 매월 이미 지급된 퇴직금 명목의 금품도 소정근로(정해진 근로)의 대가인 임금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매월 지급한 퇴직금 명목의 금품이 퇴직금으로서의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정근로에 대한 임금으로서의 효력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사용자는 법률상 원인 없이 근로자에게 퇴직금 명목의 금품을 지급함으로써 상당한 손해를 입는 것이라고 봤다. 반면 근로자는 같은 금품 상당의 이익을 얻는 셈이 되므로 근로자는 수령한 퇴직금 명목의 금품을 부당이득으로써 사용자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공평의 견지에서 합당하다고 했다.
우리 법원은 퇴직금제도가 근로기준법(현행법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상 중요한 강행규정(당사자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규정)이기 때문에 퇴직금 지급 조건에 맞지 않는 변형된 퇴직금 지급 행위를 강행법규 위반의 법률행위라며 항상 무효로 판단해 왔다. 위 전원합의체 판결도 이 점에서는 같다.
약정에 의해 지급된 금품의 성격은?
그런데 약정에 근거해 명확히 지급된 금품의 성격을 임금으로 보느냐, 아니면 법률상 원인 없이 지급된 금품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미 지급된 금품을 반환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라진다.
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전의 하급심 판례와 학계 일부에서는 반환받을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가령 월급에 포함된 퇴직금은 퇴직금으로서의 성격은 없고 통상임금에 해당해 반환의무가 부정된다는 하급심 판례가 그렇다. 또 퇴직금을 미리 지급한다는 약정은 근로자가 퇴직금을 사전에 포기하는 약정이므로 무효이고 퇴직금 명목으로 지급된 금액이 부당이득으로 반환돼야 한다면 퇴직금을 미리 지급하는 약정을 인정하게 돼 퇴직금 보장의 입법 취지를 훼손하게 된다는 많은 하급심 판례가 그렇다. 이미 지급된 금액은 통상임금에 해당하고 부당이득 반환채권이 발생할 여지는 없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미리 지급한 퇴직금이 중간정산으로서의 효력이 없다면 그간 지급된 금품은 임금 지급약정으로 유효한 것으로 봐야 하고 만일 그 반환을 허용하게 되면 퇴직금 지급의무를 탈법적으로 회피하려고 한 사용자에게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어 강행규정인 퇴직금 제도를 훼손하게 된다고 하는 견해가 그렇다.
그런데 위 전원합의체 판례는 무효인 약정에 따라 퇴직금 명목으로 지급된 금품만큼은 임금이 아니라 부당이득이라고 확인한 것이다. 퇴직금 지급의무를 회피하거나 면탈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퇴직금에 해당하는 명목의 금품을 합리적으로 설정해 지급해 온 사용자로서는 퇴직금 지급의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이미 지급한 퇴직금 명목의 금품을 반환받을 수도 없게 된다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퇴직금을 매월 급여나 연봉에 산입해 지급하는 근로계약 형식을 빌려 사실상 퇴직금에 해당하는 임금지급 의무를 면탈(免脫)하려는 일부 기업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사례 때문에 위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도 퇴직금 명목의 금품을 부당이득으로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퇴직금 분할 약정의 유효성을 승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취지의 의견을 내기도 했다.
퇴직금 지급의무 회피는 안 돼
앞으로의 과제는 기업들의 법 회피가 발생하지 않도록 분할지급한 금품이 퇴직금 명목의 임금인지 여부를 잘 밝혀내는 일이다. 위 전원합의체 판례의 후속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2년 10월11일 선고 2010다95147 판결)에서는 퇴직금 제도를 강행법규로 규정한 입법취지를 감안할 때 위 전원합의체 판례의 법리는 해당 약정의 실질이 임금을 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퇴직금 지급 의무를 면탈하기 위해 퇴직금 분할 약정이란 형식만을 취한 것인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 해외선 퇴직일시금제도 대신 노령연금으로 해결
한국의 법정퇴직일시금제도는 다른 선진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제도다. 대부분의 선진 국가에서는 노령연금제도를 통해 이를 해결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퇴직일시금제도를 둘러싼 법적 다툼이나 쟁점을 다른 선진 국가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최근 한국도 고령사회에 맞춰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했다. 퇴직연금제도 도입은 종전의 퇴직일시금을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는 절차가 필요하고, 그 절차는 근로자대표 과반수의 동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제도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과반수 노조나 근로자대표가 존재할 경우 퇴직연금제로의 전환은 어렵다. 따라서 위 전원합의체 판결과 같은 법적 쟁점은 퇴직연금제를 도입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편, 위 전원합의체 판결은 그간 근로관계 중 급여를 통해 분할 지급된 퇴직금 지급의 무효를 재차 확인하고 이미 지급된 금액을 임금으로 봤던 것과 달리 퇴직금 지급은 무효이지만 이미 지급된 퇴직금 명목의 금품은 부당이득으로 사용자가 반환 청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는 우리 경제 발전에 따라 근로자들의 임금이 어느 정도 상승했다는 시장임금 환경과 사용자와 근로자 간 공평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희 <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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