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20억년 전 지구가 빚은 '협곡 대서사시'… 원시의 땅을 걷다

입력 2017-12-03 16:02
고아라 여행작가의 좌충우돌 미국 여행기
(10) 자이언 캐니언·그랜드 캐니언

800m 깎아지른 대협곡 속으로…이곳이 바로 미국판 무릉도원

어느새 일몰이 다가오고… 그랜드 캐니언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미국 남서부에 있는 콜로라도 고원은 드넓은 광야, 외로운 사막, 까마득한 협곡의 고향이다. 대지와 강, 바람과 시간이 탄생시킨 수많은 자연 유산 중에서도 단연 하이라이트가 있다. 지구 20억 년 역사의 나이테가 새겨진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과 버진강(Virgin River)이 조각한 붉고 푸른 신의 낙원 자이언 캐니언(Zion Canyon)이다. 하염없이 깊은 절벽, 미로처럼 엉킨 협곡,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품은 원시의 땅을 거니는 동안 깨달았다. 대자연 앞에 인간은 한낱 모래알보다 작고 무력한 존재임을.

그랜드 캐니언=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미국에서 만난 무릉도원

브라이스 캐니언을 떠나 약 120㎞ 떨어진 곳에 있는 자이언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으로 향한다. 동쪽 입구를 지나자 체커보드 메사(Checkerboard Mesa)라는 이름의 하얗고 거대한 기암괴석이 자이언 국립공원의 시작을 알린다. 브라이스 캐니언과 자이언 캐니언을 연결하는 9번 국도는 이제 붉게 칠해진 마운트 카멜 하이웨이(Mount Carmel Highway)로 바뀌었다. 미국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경관 도로답게 호쾌한 풍경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협곡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 1.8㎞의 칠흑 같은 터널의 끝을 지나자 눈앞에는 거짓말처럼 한 폭의 산수화가 그려진다. 성전처럼 우뚝 솟은 형형색색의 거대한 바위산, 그 머리 위를 맴도는 자욱한 안개, 아득한 골짜기를 가득 메운 청명한 빛깔의 나무들, 그야말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꿈 같은 광경이다. 이곳은 본래 지금의 라스베이거스에 살던 인디언 파이우트(Paiute)족의 언어로 ‘꼿꼿하게 뻗은 협곡(Straight Canyon)’이란 의미를 지닌 무쿤투윕(Mukuntuweap)이라 불렸다.

1860년대 몰몬교도들이 정착하면서 ‘안식처’란 뜻의 자이언(혹은 시온, Zion)이란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후 1909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가 협곡 일대를 ‘무쿤투윕 국가 기념물’로 지정했으나 1919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면서 자이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이언 캐니언은 그랜드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Bryce Canyon)과 더불어 흔히 ‘미 서부의 3대 협곡’이라 불린다.

그랜드 스테어스(Grand Stairs) 지층대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생성 시기와 과정은 물론 생김새 또한 완전히 다르다. 퇴적층 최하부에 있는 그랜드 캐니언의 나이가 가장 많고 최상부의 브라이스 캐니언이 가장 젊다. 자이언 캐니언은 중간층에 해당한다. 약 2억4000만 년 전에 형성된 카이밥 지층(Kaibab Formation)부터 최정상의 다코타 지층(Dakota Formation)까지 총 9개의 지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콜로라도강(Colorado River)에 의해 형성된 그랜드 캐니언과 달리 자이언 캐니언은 버진강의 북쪽 지류인 노스 포크(North Folk)의 작품이다. 미 서부 대부분 협곡은 높은 곳에서 전체적인 경관을 내려다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자이언 국립공원은 반대다. 여행의 시작을 협곡의 밑바닥에서 한다. 별다른 트레킹을 하지 않는 한 협곡을 올려다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풍경을 바라본다는 느낌보다는 그 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깊이는 최고 800m에 이르고 길이는 24㎞에 달하는 협곡을 우러러보는 내내 강물 소리, 새소리, 숲 내음이 맴돈다. 자이언 캐니언이 유독 웅장하면서도 아늑하고 신비로운 이유다.

천사도 쉬었다 가는 앤젤스 랜딩

자이언 국립공원은 유타주에 있는 5개의 국립공원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 접근성이 좋고 버진강이 형성한 풍부한 생태계와 독특한 자연환경 속에서 트레킹, 캐니어닝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이언 국립공원은 크게 남쪽의 자이언 캐니언과 북쪽의 콜롭 캐니언(Kolob Canyon)으로 나뉜다. 대부분 여행객은 주요 명소가 집중돼 있는 자이언 캐니언 지역을 찾는다. 공원을 탐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자이언 캐니언 시닉 드라이브(Zion Canyon Scenic Drive)를 달리며 협곡을 둘러보는 것이다. 비지터센터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더 그로토(The Grotto), 위핑 록(Weeping Rock) 등 9개의 스폿을 거쳐 시나와바 사원(Temple of Sinawava)까지 이어진다. 성수기에는 개인 차량 진입이 통제되는 대신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자이언 캐니언 여행의 꽃은 단연 트레킹이다.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로 꼽히는 앤젤스 랜딩(Angel’s landing)과 더 내로우스(The Narrows)를 포함해 21개의 다채로운 트레일이 공원 구석구석에 뻗어있다.

앤젤스 랜딩은 총 길이 8.7㎞의 코스로 더 그로토에서 시작된다. 왕복 5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험준한 스위치 백 구간이 포함된 강렬한 코스다. 특히 트레킹 후반부로 들어서면 천 길 낭떠러지가 양쪽으로 펼쳐진 얇고 가파른 바위를 쇠줄 하나에 의지해 올라야 한다. 올라온 것이 잠시 후회될 만큼 아찔한 높이지만 정상에 서는 순간 모든 고생은 잊혀진다. 단풍이 만개한 듯한 오색빛깔의 첩첩산중 사이로 버진강이 유유자적 흐른다. 당장이라도 천사들이 내려올 것만 같은 극적인 풍경이다.


더 내로우스는 시나와바 템플에서 시작된다. 곱게 포장된 리버사이드 워크 트레일(Riverside Walk Trail)을 걷다 보면 어느새 길은 사라지고 계곡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부터 더 내로우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슬롯 캐니언 사이를 지나 자이언 캐니언의 몸통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절벽은 높아지고 야생성도 깊어진다. 강한 물살을 거슬러 올라야 하고 때로는 수영도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코스지만 그래서 특별하다. 기후가 나쁘거나 수위가 높은 경우 트레킹이 제한되므로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오버룩 포인트(Overlook Point)나 와치맨(Watchman) 트레일도 좋은 선택이다. 난이도는 비교적 쉽고 소요시간도 1~2시간으로 짧지만 앤젤스 랜딩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지구 역사의 절반이 담긴 땅 그랜드 캐니언

‘지구가 선사하는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그랜드 캐니언은 미국 애리조나주 북쪽에서 시작돼 네바다주 경계까지 뻗어있다. 길이는 약 446㎞, 최대 폭 29㎞, 깊이는 최고 1.6㎞에 달하는 문자 그대로 광대한 협곡이다. 그랜드 캐니언이 위대한 이유는 단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거대한 협곡에는 20억 년에 가까운 지구 흔적이 고스란히 쌓여있다. 지구 나이가 대략 50억 년임을 감안하면 무려 절반에 가까운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다. 협곡 가장 밑의 비슈누 기반암(Vishnu Basement Rocks)부터 최상부의 카이밥 지층까지 선캄브리아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시대의 지질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포개져 있다. 계곡에 노출된 지층들이 만들어진 것은 20억 년 전이지만 협곡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된 것은 약 600만 년 전이다. 해안지대가 융기하며 형성된 콜로라도 고원을 거센 콜로라도강과 바람이 오랜 시간 침식, 풍화시킨 결과 현재의 그랜드 캐니언이 탄생했다. 미 대륙의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그랜드 캐니언 일대 또한 아나사지, 코호니나, 후알라파이, 하바수파이를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오랜 터전이었다. 1540년 스페인 탐험가가 유럽인 최초로 이곳에 발을 디뎠고, 지질학자 존 웨슬리 파웰(John Wesley Powell)이 콜로라도강을 따라 그랜드 캐니언을 탐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919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1979년에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은 크게 사우스 림(South Rim)과 노스 림(North Rim)으로 나뉜다. 노스 림은 사우스 림보다 400m나 높은 해발 2438m에 있는데 겨울철(10월 중순~5월 중순)에는 눈이 많이 내려 개방하지 않는다. 대부분 자유 여행객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고 연중 내내 개방하는 사우스 림을 찾는다.

그랜드 캐니언을 즐기는 방법

사우스 림을 여행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허밋 로드(Hermit road)와 데저트 뷰 로드(Desert view road) 따라 조성된 전망대에서 그랜드 캐니언과 콜로라도강의 다양한 모습을 조망하는 것이다. 그중 매더 포인트(Mather Point) 전망대는 뛰어난 접근성과 장쾌한 풍경 그리고 일출명소로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멋지지만 그랜드 캐니언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걸어야 한다. 사우스 림과 노스 림에 걸쳐 형성된 6개의 트레일 중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브라이트 앤젤 트레일(Bright angel trail)이다. 그랜드 캐니언 빌리지를 시작으로 콜로라도강이 흐르는 협곡의 바닥까지 장장 15.3㎞를 내려간다. 당일 왕복도 가능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하루 일정으로 트레킹을 할 경우 2.4㎞ 정도 떨어진 휴게소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완주가 목표라면 트레일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한 뒤 여유롭게 일정을 잡고 움직이는 것이 좋다. 한낮 기온이 50도까지 치솟는 한여름과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벼운 산책을 원한다면 림 트레일(Rim Trail)이 제격이다. 평탄한 길을 따라 여유롭게 걸으며 그랜드 캐니언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면 새의 시선으로 그랜드 캐니언을 조망할 수 있는 헬기 투어나 노새를 타고 협곡 사이를 누비는 뮬 트립(Mule Trip)도 가능하다. 그랜드 캐니언의 아름다움은 일출과 일몰 때 절정을 맞는다. 석양이 질 무렵 호피 포인트(Hopi Point) 전망대로 향한다. 온종일 협곡 사이사이에 그림자를 수놓던 구름은 어느새 사라졌다. 푸르기만 하던 하늘은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태양이 하강할수록 절벽에 새겨진 지구의 시간들은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찬란하게 빛난다.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의 경이로움, 이를 조각한 강물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위로 하루도 빠짐없이 협곡 위로 뜨고 졌을 태양을 생각한다. 오직 그랜드 캐니언에서만 받을 수 있는 자연의 위대한 선물이다.

여행 정보

라스베이거스 국제공항을 기준으로 자이언 캐니언은 약 280㎞,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까지는 약 450㎞ 떨어져 있다.

입장료는 두 국립공원 모두 자가용 한 대당 30달러이며 1주일간 유효하다. 주변의 다른 국립공원과 함께 방문할 경우 연간패스(80달러)를 구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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