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그르치면 한 해의 농사는 망가진다. 그렇듯 농가에는 계절에 맞춰 힘써야 할 일이 있다. 그를 적은 단어가 시무(時務)다. 글자 그대로 ‘때(時)에 따라 힘써야 할 일(務)’의 엮음이다. 그러나 농가의 월령(月令)에만 그치지 않는 단어다.
시간 또는 상황에 맞춰 해야 하는 일, 더 나아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업무를 가리키는 단어로 더 흔히 쓰인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에서도 이 말은 자주 등장했다. 처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일, 놓쳐서는 정말 곤란한 일을 가리킨다.
고려 초기의 개혁을 주도했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 28조》가 유명하고, 조선 율곡 이이(李珥)의 시무책 또한 이름나 있다. 모두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삼아야 할 영역에 힘을 집중하자는 건의였다.
지금의 국방장관 격인 병조판서 자리에 올랐던 율곡의 정치 개혁 방안 중에는 천민과 노비 중에서도 인재를 뽑자는 내용이 들어 있다. 양반과 상민을 엄격하게 차별했던 조선왕조의 고리타분한 원칙론은 없다. 대신 국방력이 형편없었던 조선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세상은 제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늘 변수가 등장한다. 그런 시간과 상황의 맥락을 시세(時勢), 형세(形勢), 형국(形局), 추세(趨勢), 국세(局勢) 등으로 적을 수 있다. 제가 품은 이상과 뜻이 아무리 좋더라도 시간과 상황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를 조정하지 못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오래전에 이 말은 선을 보였고 동양의 왕조 시절 내내 자주 쓰였다. 특히 《안자(晏子)》에 등장하는 “때에 맞춰 힘써야 하는 일을 알면 준걸, 시세에 대응할 줄 알면 영웅(識時務者爲俊杰, 通機變者爲英豪)”이라는 말이 아주 유명하다.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는 일이 분단 이후 대한민국의 변치 않는 시무다. 북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더 바짝 우리를 옥죄는 시점에 국가정보원이 대공(對共) 수사권을 포기한다는 개혁안을 내놨다. 시무를 아예 외면한 자세다. 예로부터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람대접을 못 받았다. 그런 사람들은 인사불성(人事不省)이란 말까지 들었다.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