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무역구제 조치에 소극적일 이유 없다

입력 2017-11-30 18:06
반덤핑·상계관세 등 강화되는 보호무역 공세
보복 우려한 수출기업 국내 피해 방어엔 소홀
수입품의 불공정 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신희택 < 무역위원회 위원장 htshin@snu.ac.kr >


2016년 6월, 유럽연합(EU)의 한 축이던 영국인들은 자국의 일자리 보장과 경제적 이익을 명분으로 EU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Brexit)에 표를 던졌다. 같은 해 11월 미국인들 역시 일자리 보장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친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후 올 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보호무역주의 분위기를 확산시켜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선,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과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차례로 거론하며 글로벌 자유무역 시류에 날카로운 창을 겨눴다. 뒤이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 등 무역구제 조치라는 두꺼운 방패로 자국 산업과 일자리를 보호하고 나섰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미국은 반(反)덤핑 제소국 2위, 보조금 상계관세 제소국 1위를 차지할 만큼 무역구제 조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기업들은 철강, 자동차, 가전 등 전통 제조업 부활 정책에 힘입어 미국 정부에 더욱 강한 무역구제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달 미국 ITC는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최대 50%의 관세를 부과하는 세이프가드 발동 권고안을 연이어 내놓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최종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눈에 띄는 점은 미국 ITC의 적극적이고 발 빠른 대응인데,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 조사는 수니바의 제소 이후 4주 만에, 세탁기는 월풀의 제소 이후 1주 만에 착수했을 정도다. 게다가 무역구제 조사 건수는 올해 8건으로 2014년 2건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수입규제 대상 품목도 철강에서 가전, 기계, 섬유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는 등 보호무역 시대로 회귀하는 신호로 보일 정도여서 한국 관련 기업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 글로벌 자유무역의 역사를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국과 미국의 이런 태도 변화는 자국 산업 보호와 일자리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 국가적 가치로 자리잡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주요국의 보호무역주의 행보를 의식했을까? 얼마 전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제25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21개국 정상은 보호무역주의 조치에 대한 경계와 자유무역 확대를 위한 다짐을 ‘다낭 선언문’에 담았다. 같은 맥락에서 그동안 한국은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일관되게 보호무역주의를 배격해왔다. 특히 국내 시장이 협소해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우리 기업들은 수출 대상 국가의 보복을 우려해 산업 피해에 대한 무역구제 조치 신청에 소극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올해 한국의 무역액이 3년 만에 1조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라는 소식은 반갑다. 하지만 상반기 교역액 5133억달러 중 수입액이 약 46%를 차지하고 지난해 대비 수입액 증가율(21.3%)이 수출액 증가율(15.7%)을 웃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 수출품에 대한 수입국의 수입규제 대책 못지않게 증가하는 수입 제품이 국내 산업과 일자리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자유무역의 가치를 수호해야 할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산업과 일자리 보호를 앞세운 신(新)보호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통상 환경은 우리나라 무역구제 제도 및 운용이 한 단계 도약해야 할 당위성을 시사한다.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에 대한 국내 기업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뜻의 무역구제는 불공정한 무역 행위와 특정한 물품 수입으로 인해 국내 산업이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는 경우에 관세 부과 등을 통해 보호하는 제도다.

무역구제 제도는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WTO가 인정하는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국내 산업 보호 수단이며 무역위원회는 이 제도를 운영할 권한을 가진 국내 유일의 기관이다. 우리 기업들도 덤핑, 보조금 등 수입품의 불공정한 행위에 대응하는 무역구제 제도를 적극 활용할 것을 기대한다. 보호무역은 지양해야 하지만 국내 산업과 일자리 안전망으로서의 공정무역 확보를 위해서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대응도 매우 중요하다.

신희택 < 무역위원회 위원장 htshin@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