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란 기자의 Global insight
미국, 경제압박 통해 '편 만들기'
러시아, 자금 지원으로 영향력 확대
중국, 돈 빌려주고 석유 확보 속셈
[ 허란 기자 ]
2003년 이라크 전쟁은 21세기 최초의 ‘자원 전쟁’으로 불린다. 중동 안정이라는 명분 뒤엔 이라크 석유자원 개방이라는 실리가 있었다. 시리아 나이지리아 우크라이나 남수단 내전이나 남중국해 갈등도 마찬가지다. 원유와 천연가스를 차지하려는 현대의 ‘충동’이 오랜 갈등의 불씨를 부채질해 촉발된 에너지 전쟁들이다.
충동의 불씨가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인 베네수엘라로 옮겨갔다. 포탄 대신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직면한 채권이 오가는 전쟁이다. 석유 자원만 믿고 무차별한 복지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정책을 펼친 베네수엘라는 재정 파탄에 이르렀다. 외환보유액은 20년 만에 최저 수준인 100억달러(약 11조원) 밑으로 떨어졌다. 급기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해외에서 발행된 모든 채권을 재구조화하겠다고 발표했다. 890억달러(약 99조원)가 넘는 빚을 스스로 깎겠다고 나선 것이다.
베네수엘라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한 것은 패권국(미국)과 도전국(러시아, 중국) 간 파워게임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미 좌파동맹의 핵심축인 베네수엘라가 눈엣가시인 워싱턴과 남미에서 옛소련의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모스크바, 석유가 필요한 베이징의 수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3대 석유 수입국으로 전체 수입량의 12%를 차지한다. 동시에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무기로 미국에 맞서고 있다. 미국과 베네수엘라 관계는 1999년 사회주의자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 주요국의 우경화로 미국에 우호적인 환경이 형성되고 있다. 베네수엘라까지 우파로 돌아선다면 미국은 중남미 관계를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마두로 정부 인사들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한 데 이어 지난 8월 미국 월가의 베네수엘라 채권 재구조화를 금지하며 베네수엘라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배경이다.
반면 러시아는 마두로 정권을 이용해 미국의 앞마당인 남미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구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쿠바 니카라과 등 옛 소련과 긴밀했던 나라들과의 관계를 복구했다. 러시아는 남미에서만 150억달러 이상의 무기를 팔았으며 베네수엘라는 주요 고객 중 하나다. 러시아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 에너지개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중국은 좀 더 실리적이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600억달러가 넘는 돈을 베네수엘라에 빌려준 대가로 안정적인 석유 자원을 확보했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을 압박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 개입을 바랐을지 모른다. 내년 투명한 대선을 치르는 대가로 베네수엘라 야당이 마두로 정권과 채무조정을 타결하는 시나리오를 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패는 달랐다. 러시아는 지난 15일 베네수엘라와 35억달러의 양자 간 부채를 재조정해 다른 채권자에게 돈을 갚을 수 있게 해줬다. 중국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연말까지 마두로 정권에 40억달러를 추가로 빌려줄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으로 마두로 정권이 힘을 받으면서 야당의 정권 교체 가능성도 현저하게 줄고 있다. 올해 야당이 주도한 반정부 시위는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지만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70%가 넘는 국민이 정부의 식량 지원에 연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식량은 마두로 정권을 지지하는 표(票)가 됐다. 그 덕분에 마두로 대통령은 제헌의회를 장악했으며, 군부는 물론 사법권 언론 선거관리기구까지 모두 통제하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전체주의 체제로 접어든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패권 경쟁의 청구서는 생각보다 크다. 베네수엘라는 연 4000%가 넘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을 겪고 있다. 정권의 유일한 돈줄인 원유 생산량은 작년 대비 20% 이상 감소했다. 군부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식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미국이 언제까지 마두로 정권을 두고 볼까.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옵션까지 언급했다. 하지만 군사 개입은 미국의 간섭을 받은 역사가 있는 중남미 국가들의 반감만 살 뿐이다. 외교적인 노력만이 베네수엘라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다. 마두로 정권의 핵심 지지층인 군부가 열쇠가 될 가능성도 있다. 짐바브웨의 경우처럼 군부가 항상 충성스럽지만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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