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통한 권력분점 불문율 지켜온 아랍권
32세 사우디 왕세자의 도발적 개혁에 '흔들'
'승자의 품격' 잃은 권력독식은 위험하다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
왕위 승계가 임박한 32세의 사우디아라비아 실세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주도하는 개혁의 칼날이 시퍼렇다. 사촌형제 왕자들을 줄줄이 구속하고 30여 명의 사우디 최상위 권력층과 재벌총수들을 전광석화처럼 체포해 구속했다. 더 많은 숫자의 반대파 왕실 가족과 기업인이 가택연금 상태나 압박을 받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쏟아져 나온다.
이는 오랜 아랍사회의 불문율을 깨는 파격이고 국가 권력 분점과 정책 결정 메커니즘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획기적 조치들이다. 여성 운전 허용과 온건 이슬람주의 채택, 사막에 서울 면적 44배 규모의 새로운 첨단도시 건설을 통해 젊은 미래세대를 끌어안는 동시에 노회한 반대파 기득권 세력을 부패세대로 몰아 철퇴를 가하고 있다. 반대 세력이 소유한 엄청난 부를 새 왕정에 헌납하게 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정부 재정 상태를 개선하려 한다는 분석 보도도 나온다.
전통적으로 아랍사회나 이슬람 경제에서는 권력 분점과 부의 분배가 핵심가치로 작동해 왔다. 결정 방식은 전원합의제를 지향한다. ‘슈라’라고 불리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주요 부족 대표들로 구성되며 각계각층을 대변한다. 슈라는 합의가 될 때까지 숙의를 거듭하는 게 특징이다. 절충과 중재, 적대적 이해당사자 간의 화해가 합의 과정의 꽃이다. 그렇게 내려지는 최종 결정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모든 구성원이 자신이 가진 힘과 역량에 따라 합의된 정치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배분받는다. 이 구도는 사회적 합의란 점에서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랍 세계에서는 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이 수십 년씩 지속되고, 특정 사업이나 국가 업무를 특정 부족 세력이 장악하는 것이 다반사다. 독재자들이 30~40년간 별다른 저항 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일정 부분 권력 분점이라는 불문율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랍인 우선 정책을 편 7세기 우마이야 왕조가 100년도 못 돼 아바스 왕조에 패망하고 이란계 소수집단을 포용한 새 왕조가 5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런 합의원칙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심각한 갈등이 야기된다. 심지어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계권 결정에서도 그의 사위이자 직계혈통인 알리를 제치고 무함마드의 친구들이 줄줄이 후계자인 칼리프가 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떨어져나가 시아파가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슬람 세계를 둘로 갈라놓은 갈등의 씨앗이 됐다.
사우디 왕세자의 권력 집중과 부의 극대화 시도는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더욱이 권력독식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란과의 적대적 대치 상태를 강화하고 안보를 명분으로 미국 무기 최대 구입국으로서 미국에 밀착하는 정책과 이스라엘까지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해방과 반(反)이스라엘을 공통분모로 내세워 온 중동 권력구도에 근본적인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18일 신일희 계명대 총장이 계명대 교양강좌 ‘아카데미아 후마나’에서 한 강연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참으로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신 총장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승자인 북군 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남군 패장 로버트 리 장군에게 보여줬던 화해와 품격의 자세를 역설했다. 당시 항복문서에 서명하러 온 패장에게 모든 북군 장교들은 정중한 거수경례를 보냈고, 승자로서 조금도 무례하거나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장해제당한 2만5000명의 남군에게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소총과 개인 무기 소지를 허용했고, 그들 소유의 군마와 나귀 등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남군이 쓸쓸히 퇴장할 때 북군은 승자의 특권인 승리의 함성조차 자제했다고 한다.
십자군 전쟁 때 참혹한 인종청소를 겪으며 기독교 세력에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재탈환했을 때,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하고 원하는 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갖고 떠나게 했던 아랍 장군 살라딘이 보여준 ‘승자의 포용’은 10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살라딘이 영웅과 성인으로 칭송받는 원천이다. ‘적폐청산’ ‘부패고리 단절’ 같은 판에 박힌 구호들이 난무하는 이즈음 우리에게도 승자의 품격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