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일을 마무리 지을 때 또는 시작할 수 있을 때

입력 2017-11-23 18:18
41세에 오페라 '파우스트'를 쓴 구노처럼
'내일이 있다' 생각하고 작은 실천 하기를

이경재 <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


초등학생 딸아이가 동당동당 피아노를 두드린다. 처음 시작할 때는 검은색 건반보다도 작은 손가락으로 겨우 피아노 건반을 짚어나가더니 이제는 제법 두 손으로 치며, 멜로디를 흥얼거릴 정도로 능숙함을 뽐내려는 마음이 들린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어릴 적에 피아노 치기를 참 싫어했다. 커다란 검은색 피아노 앞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며 피아노를 쳐야 하는 20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시계를 조금 돌려놓기도 해보고, 악보를 뒤적이며 딴청을 피워봐도 연습시간이 안 가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탓으로 성인이 돼서 피아노를 못 치는 사람이 됐다. 사실 딸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초반에는 그래도 필자가 더듬거리는 아이의 수준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연습하면 피아노를 제법 연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동당거리는 아이의 악보를 슬며시 따라 쳐 보려는데 당연히 잘 되지 않았다. 마음이 생겼을 때 연습을 조금 더 해두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이 남았다.

유명한 음악가지만 오페라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늦게 이름을 알린 작곡가로 프랑스 출신 샤를 구노가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아베마리아’라는 소품이 유명하지만 오페라 작품으로는 괴테의 작품을 기초로 한 ‘파우스트’가 불세출의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구노는 예술가적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음악교육을 온전히 받으며 성장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음악성과 함께 ‘로마대상’을 받는 음악적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상을 계기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하면서 종교음악에 심취하게 됐는데, 그 결과 파리로 돌아와서는 성직자로서 해외 선교회에 입회해 활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음악적 동기부여가 더 강해서 결국은 작곡가로 마음을 돌렸다.

모차르트, 로시니, 도니체티 등 당시 놀라운 오페라 작곡가에 비하면 30대 중반의 음악가 구노는 제대로 된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다섯 살 때부터 연주하고 열 살 때 오페라를 내놓은 모차르트, 마흔 편 가까운 작품을 쓰고 오십대에 은퇴를 선언한 ‘세비야의 이발사’의 로시니, 당대에 로시니보다 서른 편 이상 더 작곡하는 등 속필과 다작으로 유명한 ‘사랑의 묘약’의 도니체티 등을 비롯한 다른 작곡가에 비하면 30대에 작곡한 구노의 오페라 한두 편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흔한 살에 내놓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는 구노 자신뿐만 아니라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걸작이 됐다.

어느덧 한 해의 대부분이 지났다. 건듯 찬바람이 부니 더욱 한 해가 다 지났음이 실감난다. 많은 일을 하고 지냈지만 못한 일들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 때문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면 아직도 시간은 있지 않은가? 아직도 할 수 있는 내일이 있다. 혹여 늦가을 정취가 쓸쓸하다면, 또는 아쉬움이 남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마음이라면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하나 주워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그것을 책갈피에 꽂아 두면 언젠가 오는 내일에, 또는 그보다 더 먼 어떤 내일에 다시 발견하게 되겠지. 오늘 움직였던 작은 행동으로 어떤 미래에 작은 기쁨을 가질 수 있겠다.

필자도 오늘 낙엽 하나 주워 들고 피아노 앞에 앉아 봐야겠다. 낙엽을 악보 사이에 끼워 둬야겠다. 언젠가 다시 피아노 연습을 할 때면 오늘 주운 낙엽을 또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겠지. 피아노는 여전히 못 치고 있겠지만….

이경재 <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