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미국 공장 짓는데도 '관세폭탄'
16년 만에 빼든 세이프가드
만만한 한국부터 정조준한 미국
FTA협상 활용… 중국·일본에 경고도
삼성·LG 미국 공장 짓는데
수입 부품까지 관세 매겨… "일자리 창출 방해" 지적
자국 우선주의 따른 조치… 트럼프, 내년 초 결정 주목
[ 박수진 기자 ]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가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에 대해 최고 50%의 관세 부과를 권고했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권고를 수용할지 내년 초 결정한다.
관세 부과가 결정되면 한국은 미국이 16년 만에 발동하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의 첫 희생양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으로 미국 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각각 세탁기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과 LG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조치다.
USITC는 21일(현지시간)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이 미국에 수출하는 대형 가정용 세탁기 중 120만 대를 초과하는 물량에 첫해 50%, 2년 차 45%, 마지막 해 40% 관세를 부과하는 저율관세할당(TRQ)을 미 행정부에 제안했다.
이는 미 세탁기 제조업체인 월풀이 삼성과 LG 제품 때문에 피해를 본다며 구제해달라고 제소한 데 따른 것이어서 사실상 두 한국 기업을 겨냥한 판정이다. TRQ는 일정 물량에 낮은 관세를 매기되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수입제한조치다.
USITC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세탁기 부품에 대해서도 TRQ를 적용할 것을 권고했다. 첫해는 5만 대 분량을 초과하는 물량에 50%, 이듬해엔 7만 대 초과 물량에 45%, 마지막 해엔 9만 대 초과 물량에 40%의 관세를 부과하자는 안을 내놨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번 권고가 미국 내 일자리와 소비자 선택권을 크게 제한하는 조치라며 유감을 나타냈다. USITC는 다음달 4일까지 이 권고안을 백악관에 보고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60일 이내 세이프가드 발동 여부와 수위를 결정한다.
미국 내 대형 가정용 세탁기 시장 점유율은 월풀이 38%로 가장 높다. 이어 삼성(16%), LG(13%) 순이다. 삼성과 LG가 지난해 미국 시장에 수출한 세탁기 물량은 250만 대로 총 10억달러(약 1조1400억원)어치였다.
지난 5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에 무역구제 조치를 청원한 미국 월풀은 당초 삼성과 LG전자 세탁기 완제품과 부품에 모두 3년간 50% 관세 부과를 요청했다. 삼성과 LG는 무역구제가 꼭 필요하다면 TRQ(저율관세 할당)를 적용, 145만 대를 초과하는 물량에만 50%를 부과해 달라고 역제안했다. USITC는 한국 측으로부터는 TRQ 적용을, 월풀로부터는 50% 관세 적용을 각각 받아들였다. 4명의 USITC 위원이 만장일치로 이 절충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쿼터 내 물량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민주당 추천을 받은 론다 슈미트라인 위원장과 어빙 윌리엄슨 위원은 15~20% 관세를 물리자고 한 반면 공화당 추천을 받은 데이비드 존슨 부위원장과 메리디트 브로드벤트 위원은 무관세를 주장했다.
관련 업계는 추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 과정을 주목하고 있다. 준사법기관인 USITC는 법리를 따르지만 백악관으로 넘어가면 외교·안보 측면까지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관계나 미국에 대한 투자와 일자리 창출 효과까지 종합적으로 감안해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3억8000만달러를 투입해 내년 초 준공을 목표로 세탁기 공장을 짖고 있다. 이 공장은 내년 말까지 1000여 명을 고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LG전자도 테네시주에 내년 말 준공을 목표로 세탁기 공장을 세우고 있다.
한국 전자업계는 “수입 세탁기에 고율의 관세를 매긴 것은 미국 내에서 제품을 생산하라는 시그널로 해석할 수 있다”며 “그런 측면에서 USITC가 수입 부품에까지 관세를 매긴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미국 내 공장 건설과 생산에 차질을 줘 일자리 창출을 방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달 초 미 의회 의원 7명도 USITC에 50% 관세 부과는 “미국인의 일자리와 소비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담은 서한을 보냈다.
산업통상자원부 등 한국의 관련 부처는 이번 USITC의 권고가 사실상 한국 기업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등을 앞두고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발동 등을 협상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워싱턴 통상 전문가는 “만만한 한국을 겨냥함으로써 앞으로 무역적자 해소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여야 할 중국과 일본에 경고를 주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박수진/뉴욕=김현석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