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추수감사절의 칠면조

입력 2017-11-22 18:27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는 102명이었다. 이 중에는 농업·어업 등 생산직 종사자가 한 명도 없었다. 농기구나 낚싯대조차 없었다. 채 1년도 안 돼 배고픔과 질병, 혹한으로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원주민들이 종자를 나눠주며 농사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더 큰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생존자들은 옥수수 경작에 나서 첫해 가을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뒀다. 이를 감사하는 의미에서 잔치를 마련하고 원주민을 초대해 사흘 동안 축제를 벌였다. 미국 추수감사절(11월 넷째주 목요일)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왜 이날이 되면 칠면조(七面鳥) 고기를 먹는 걸까.

첫 번째 유래는 당시 사냥 나갔던 사람이 야생 칠면조를 많이 잡아와 먹기 시작했다는 설(說)이다. 칠면조의 원산지가 북아메리카인 만큼 가장 흔한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대 유럽에서 축제 때 몸집이 큰 조류를 제물로 쓰던 전통 의식이 함께 작용했다는 설이다.

칠면조에는 아미노산을 구성하는 ‘L-트립토판’이 많이 들어 있다. 이는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한다. 칠면조를 많이 먹으면 졸린다는 속설이 여기에서 나왔다. 칠면조는 잠꾸러기이기도 하다. 곤충학자 파브르의 ‘칠면조 재우기’ 일화에 나오듯이 긴 목을 어깨 밑에 묻고 요람 태우듯 흔들어주면 금방 잠에 빠진다.

칠면조는 얼굴이 7개가 아니라 머리에서 목에 이르는 피부 색이 7가지로 변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 귀족들의 관상용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영문명 ‘터키’는 터키 상인들이 칠면조를 많이 팔았던 데서 비롯됐다.

철학의 경험론적 오류를 설명할 때도 칠면조가 등장한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예화가 자주 인용된다. 1년 내내 같은 시간에 먹이를 주는 주인을 보고 “아, 저 사람이 오면 늘 밥을 먹을 수 있구나”라고 믿고 있다가 잔칫날 잡아먹힌다는 ‘일반화의 오류’ 혹은 ‘귀납법의 약점’이 대표적인 사례다.

추수감사절 때 미국 식탁에 오르는 칠면조는 5000만 마리에 이른다. 백악관에서는 매년 추수감사절 전날 ‘칠면조 사면 행사’를 연다. 링컨 대통령이 재임 시절 아들이 애지중지하던 칠면조를 잡아먹을 수 없어 백악관 뜰에서 키운 게 시초다. 트럼프 대통령도 ‘사면’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그가 던진 유머가 새삼 화제다.

그는 “난 전임자(오바마)의 행정명령을 뒤집는 데 매우 적극적이지만 그가 칠면조에게 내린 사면은 취소하지 않겠다. 그러니 (칠면조여) 편히 쉬라”며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칠면조 한 마리가 정치적 긴장까지 한순간에 녹이는 장면이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도 이렇듯 많은 이야기와 중첩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