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
얼마 전 주요 2개국(G2) 두 정상이 만났는데 ‘쌍중단’에 대한 발표가 상이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은 종종 발생한다. 몇 달 전 미국 뉴욕에서 한·중 양국의 외교부 장관이 회담을 했는데 그 내용에 대한 쌍방 발표 역시 상이했다. 우리 정부는 “전술핵 얘기는 안 했다”고 설명한 데 반해 중국 측 발표는 “한국 측은 한반도에 다시 전술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지킬 것”이었다. 그러면서 기자는 대만 학자의 견해라면서 이런 중국인의 협상술은 ‘사실 왜곡’이라는 주장을 소개했다.
"사실왜곡" VS "해석차이"
필자는 외교나 정치 등에는 문외한이지만 중국 사람들의 표현 습관 등에 대해서는 약간의 공부를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사례를 중국 특유의 협상술이라고 하기에는 아쉽다. ‘사실 왜곡’이라고 단정지으면 중국인들하고 어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 위주의 확대해석’이라면 말장난 같을까? 굳이 이렇게 파고드는 이유는 ‘사실 왜곡’을 넘어 ‘틀렸다’라는 판단을 하는 순간 상호 신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식 표현법을 이해해야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있다. 친구 사이는 물론이고 회사나 국가 간의 대화도 그럴 것이다.
협상의 현장에서 자주 마주쳤던 상황들이다. 오랜 시간 협상 끝에 최종 합의된 문건을 타이핑해 왔다. 초안 문건과 회의실 중앙에 있는 화이트 보드에는 수도 없이 수정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제 출력된 문건을 확인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게 뭔가? ‘합의한다’는 조항에 ‘基本上(기본적으로)’ 또는 ‘原則上(원칙적으로)’이 보태졌다. 따지고 들었더니 “뭐가 문제냐”고 태연히 반문한다. 훨씬 중국식 표현답고 자연스럽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크게 보면 ‘합의한다’는 사실에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지만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전혀 다른 얘기를 할 수 있다. 기본 또는 원칙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기본적 또는 원칙적으로만’ 합의한 내용은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심각한 독소조항인 것이다. 거꾸로 우리가 불리한 조항에, 상투적 표현이라며 ‘기본적으로’ 또는 ‘원칙적으로’를 넣자고 주장해보면 경험상 중국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협상에서의 '내로남불'
협상에서 상대방의 발언은 약속으로 묶어놓고 자신의 발언은 여지를 남겨놓으면 이상적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위치를 잘 점유한다. ‘引而不發(인이불발: 당기기만 하고 굳이 쏘지는 않는다)’은 중국인들 뼛속 깊이 배어 있는 표현방식이다. 그래서 주역의 대가인 쩡쓰치앙은 “우리 중국인들은 不明言的(불명언적: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민족이다”라고 말한다. ‘一明言變成烈士(일명언변성열사: 명쾌하게 말하고 나서 목숨을 잃는 행위)’는 정말 어리석다고 여긴다. 중국인들은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말을 좋아한다. 직역은 ‘어리석기가 어렵다’인데 ‘어리석어 보이기가 어렵다’라는 의역이 더 의미있다. 중국인들 화법의 특징은 ‘함축(含蓄)’과 ‘모호(含含糊糊)’다. 몰라서 모호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모호하게 얘기하고 상대방은 최대한 분명히 표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중국인의 협상술이다.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지구상의 문화를 ‘고맥락문화(high context culture)’와 ‘저맥락문화(low context culture)’로 구분했다. 중국은 전자를, 미국은 후자를 대표한다. 맥락을 알아야만 의미를 알 수 있는 고맥락문화권 사람과 단어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저맥락문화권 사람의 교류에서 후자는 늘 혼란에 빠지고 때로는 골탕을 먹는다. 속이려는 의도 없이 한 말에도, 저맥락문화권 사람들은 스스로 속아 버린다. 한편, 우리나라도 고맥락문화적인 요소가 많다.
로컬 문제는 로컬 전문가에게
어렸을 적 시골길에서 “얼마나 더 가야 되나요?”라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이제 다 왔어”가 몇 차례 있은 후에야 겨우 도착했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고맥락문화권 사람이었다. 우리도 별 차이 없다. 그런데 중국과의 여러 문제와 그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고맥락의 고수인 중국을 상대로 어설프게 배운 저맥락문화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상대하는 게 아닌가 싶다. 혹은 그런 저맥락문화에만 어울리는 인재풀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유전자 속에 ‘고맥락 DNA’가 분명히 있다. 대한민국에도 고맥락문화인 중국을 고맥락적 사고로 이해하고 대화할 줄 아는 인재들이 분명 적지 않다. 兵來將水來土掩(병래장당 수래토엄: 큰물이 오면 흙으로 막고 적이 오면 장수로 막자). 이제라도 고맥락문화와의 협상은 (저맥락문화 전문가들이 아니라) 고맥락문화를 이해하는 이들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