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릴케와 베를렌의 특별한 가을

입력 2017-11-02 18:15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kdh@hankyung.com


그해 릴케의 가을은 특별했다. 파리에서 조각가 로댕을 만나 그의 전기를 쓰고 새로운 문인들과 교우하던 1902년. 스물일곱 살 시인은 가을의 풍요를 기원하면서 불안과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왜 그랬을까. 그해 출간한 《형상시집》 속의 시 ‘가을날’을 보자.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그는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독백한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거둬들이는 것과 비움의 의미

그는 풍요와 결실의 계절에 ‘혼자인 사람’의 잠들지 못하는 시간과 이리저리 헤매는 고뇌를 얘기한다. 스무 살에 고향 보헤미아를 떠나 평생 방랑자로 떠돈 그에게 집은 특별한 의미였다. 아늑한 정주(定住)의 삶과 고독한 독거(獨居)의 이중감정을 지닌 ‘집’. 그것이 없는 사람은 그래서 ‘오래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편지라는 매개도 각별했다. 그는 날마다 오전에는 편지와 답장을 쓰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책으로 출간된 그의 편지만 7000통에 이른다.

가을은 그의 기도처럼 모든 것이 익어가는 풍요의 계절이다. 들판의 곡식과 탐스런 과일을 거둬들이는 수확의 시기다. 한편으론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고 옷을 벗는 비움의 계절이 가을이다. 벌거벗은 나목의 힘으로 앙상한 겨울을 견뎌야 하는 고독의 시기이기도 하다. 자연의 충만과 내면의 충일, 계절의 변화와 인간 본원의 고뇌. 그 사이에서 릴케는 ‘과일의 완성’을 비는 기도와 함께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했다.

릴케보다 31년 먼저 태어난 프랑스 시인 베를렌도 ‘가을의 노래’에서 낙엽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울로/ 내 마음/ 쓰라려.// 종소리 울리면/ 숨 막히고,/ 창백히/ 옛날을 추억하며/ 눈물짓노라.// 그리하여 나는 간다./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마치 낙엽처럼.’

낡은 옷을 벗고 거듭나는 계절

이 시는 그가 스물세 살 때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쓴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 함께 자란 연상의 사촌 누나였다. 금지된 사랑이었으므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기에 더욱 그랬다. 첫 시집 《우수시집(憂愁詩集)》의 출판 비용을 대 준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 시집이 나온 이듬해인 1867년 그녀는 산고 끝에 병을 얻어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그는 폭우 속을 뚫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눈물과 빗물 범벅이 된 그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술만 마셨다. 몇 달 뒤 그곳을 다시 찾은 그는 무덤 앞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바이올린 가락의 ‘긴 흐느낌’과 종소리의 ‘숨 막히는’ 아픔이 영혼의 밑바닥을 건드린다.

이들의 가을 시편을 읽으며 시각과 청각을 두루 껴안는 공감각의 인생을 다시 생각한다. 20대의 푸른 시절에 이렇게 깊은 성찰의 가을을 맞은 두 시인의 숨결이 코앞엔 듯 가깝게 느껴진다. 한 차례 비가 훑고 간 가을 숲길에서 한 겹씩 젖은 옷을 벗는 나무들의 자세를 떠올린다. 해마다 가을은 오고 가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생의 겉옷을 하나씩 벗으며 새롭게 태어난다.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