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탈원전 논리에 휩쓸려 퇴보하는 기초과학

입력 2017-10-18 18:51
수정 2017-10-19 08:43
시민단체 주장에 연구용 원자로 가동 중단
암치료 부담 늘고 산업계 650억 매출 손실

김태훈 IT과학부 차장 taehun@hankyung.com


첫 시작은 1956년이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70달러에 불과했지만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인재들을 해외에 보내기로 했다. 10개월 연수에만 1인당 6000달러의 국비가 들어갔다. 4년간에 걸쳐 150명이 미국과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법을 제정하고 연구소를 세웠다. 연구설비는 미국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그렇게 노하우를 쌓아 1985년 우리 기술로 설계를 시작했고 마침내 1995년 독자 기술을 완성했다.

국산 1호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의 탄생 이야기다.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40년 가깝게 인재 육성과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이룬 성과였다.

흔히 원자로라고 하면 전기를 생산하는 원자력발전소를 떠올린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의료용 물질을 생산하거나 과학 연구에 도움을 주는 원자로도 있다. 바로 연구용 원자로다. 대전 원자력연구원에 있는 하나로는 국내 유일한 연구용 원자로다.

우라늄을 원자로에서 태우면 열과 중성자가 나온다. 원전은 열을 이용해 물을 데우고 여기서 나온 수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이에 비해 연구용 원자로는 중성자를 사용한다. 요오드·몰리브덴 등의 물질을 연구용 원자로에 넣으면 중성자와 충돌하면서 방사능을 내는 동위원소로 변한다. 가장 유용하게 활용하는 곳은 의료 분야다. 동위원소는 특정한 암세포에만 달라붙는 특성이 있는데 자기공명영상(MRI)을 이용해 암 발생 여부를 확인하고 치료에 활용할 수 있다. 산업용 동위원소를 이용하면 선박이나 항공기 내부의 미세한 균열까지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유용한 기초과학 시설인 하나로가 3년 넘게 멈춰 있다. 2014년 7월 고장으로 멈춘 하나로는 수리를 마친 뒤에도 2년에 걸쳐 내진 보완 공사를 했지만 재가동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참여한 검증단이 부실공사 의혹 등을 점검한다며 재가동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게 주된 원인이다.

하나로 가동이 3년 넘게 막히면서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의학·산업계 매출 손실만 650억원에 달한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게 된 의료용 동위원소는 가격이 올라 환자들의 부담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중성자 연구를 위해 국내 연구진이 호주, 일본 등으로 건너가 건당 약 5만달러를 내고 연구용 원자로를 빌려 쓰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수소차용 연료전지, 국방과학연구소의 첨단 무기 연구도 차질을 빚고 있다.

과학계 곳곳에서 재가동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시민단체들은 연구용 원자로에도 탈원전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재가동을 막고 있다. 시민 검증단 내에서 하나로의 내진 보강 안전성이 확인되자 이제 와서는 이번 공사와 무관한 삼중수소(방사성물질) 문제까지 들고 나왔다. 배출량 기준치의 10분의 1 이하인데도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재가동에 동의할 수 없다는 엄포까지 내놓고 있다.

찬반 여론이 엇갈리는 탈원전 정책과 달리 하나로는 국가 기초 연구시설의 문제다.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안전 점검도 충분히 거쳤다. 이제는 규제기관이자 법적 승인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정치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안전 기준만 따져 재가동 여부를 판단하면 된다. 시민단체의 주장에 끌려다니며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과학계와 산업계의 피해가 너무 커지고 있다.

김태훈 IT과학부 차장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