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채용 확산시키려면 주관적 평가 기준 존중해줘야
박영범 < 한성대 교수·경제학 >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선 학력이 가장 중요한 채용 기준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대학, 그것도 평판이 좋은 대학을 가려고 한다. 대학을 간 후에도 높은 학점, 높은 영어 점수, 해외연수 및 봉사활동 경험 등 소위 스펙 쌓기에 열심이다. 영어 점수가 채용은 물론 승진에서도 널리 활용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한 듯하다.
몇 해 전에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구직자 847명을 대상으로 한 ‘취업시장에서 비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묻는 조사에서 ‘실무에 필요 없는 스펙 쌓기’(54.3%, 복수 응답)가 1위였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스펙초월 채용에 대해 구직자들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42.4%가 ‘스펙초월 채용 확산 추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고 답했다.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추진됐던 박근혜 정부의 국가직무능력(NCS) 기반 채용, 문재인 정부의 ‘차별 없는 채용(블라인드 채용)’은 사람 중심 채용에서 직무 중심으로 노동시장의 채용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다. 채용방식의 개혁을 통해 과도한 스펙 쌓기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부작용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NCS 기반 채용은 직무중심 채용이 기준의 하나였지만 문재인 정부의 차별 없는 채용은 모든 공공기관의 채용 시 학력, 나이, 전공 등을 입사지원서에 적지 못하도록 하고 직무 관련 사항만 기술하도록 하는 매우 강력한 탈(脫)스펙 채용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차별 없는 채용이 민간에도 확산된다면 채용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다. 국내에서 활용되고 있는 영어시험을 주관하고 있는 외국기업에서 차별 없는 채용의 확산으로 매출이 급감할 것을 우려해 대응논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차별 없는 채용이 민간부문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다소 주관적일 가능성이 있는 직무 중심 채용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객관화된 기준에 의한 인적 자원 평가 관행은 주관적인 평가에 대해 불신하는 사회 분위기와 연관이 있다. 몇몇 공공기관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규정을 무시하거나 시험 점수를 조작해 유력인사의 연고자를 우선 채용하는 채용비리 그리고 감독기관이 이를 수수방관하는 사례가 반복된다면 차별 없는 채용의 민간부문 확산은 기대할 수 없다.
학력, 학점, 영어 점수 등은 다른 나라에서도 구직자를 선별하는 준거로 활용되고 있다. 기업의 채용비용 측면에서 합리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대기업에서 시행하고 있는 지필고사 중심의 대규모 공채에 의한 채용방식과 차별 없는 채용은 같이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응시원서 작성이 매우 수월한 상황에서 노동시장에서 통용되는 객관적인 준거를 고려하지 않는 차별 없는 채용 시 발생할 막대한 채용비용을 감내하려고 하는 민간기업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몇 해 전에 한 대기업에서 채용 인원의 일정 부분을 각 대학 추천으로 선발하려 했다가 대학 서열을 조장한다는 비판에 포기한 사례에서 보듯이 합리적인 차별을 인정하고 주관적 평가를 신뢰하는 성숙한 사회분위기가 조성돼야 차별 없는 채용이 확산될 수 있다.
끝으로 우리나라는 채용뿐 아니라 보상, 승진, 교육훈련 기회 및 배치전환에서도 직무보다는 출신 대학 및 연공이 중시되고 있다. 능력과 성과 중심의 열린 노동시장이 구축돼야만 차별 없는 채용이 정착될 수 있다.
박영범 < 한성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