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경제학상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교수 기자회견
익살·농담에 청중 환호
사람들이 뭘 하길 원한다면 그걸 쉽게 하도록 유도해야
영국 보수당 '넛지팀' 100명, 정책 결정에 행동경제학 응용
시카고대는 주류경제학 본산…지금까지 '힘든 사랑' 해왔다
[ 뉴욕=김현석 기자 ]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72)는 옆구리를 쿡 찌르면 농담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9일(현지시간)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가 그를 수상자로 발표하고 몇 시간 뒤 시카고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 줄잇는 그의 농담에 300여 명 청중의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세일러 교수는 노벨상이 2년 전 오스카상을 타지 못해 받는 보상이라고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 ‘빅쇼트’에 자신이 카메오로 출연한 걸 염두에 둔 것이다.
세일러 교수는 “40여 년 비주류 취급을 받아온 행동경제학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만약 사람들이 뭘 하길 바란다면 그걸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행동경제학자다운 조언을 했다.
◆“벽을 없애면 사람들이 바뀐다”
그는 사람들의 비합리성이 경제적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왔다. 2008년 펴낸 베스트셀러 넛지(nudge)에서 연구 결과를 다뤘다. 당시 영국 보수당을 이끌던 데이비드 캐머런은 넛지를 읽고는 집권할 경우 정책에 행동경제학을 적용하겠다며 넛지팀을 구성했다. 여섯 명으로 출범한 보수당 넛지팀은 현재 100명이 넘는다.
세일러 교수는 “세계은행에 따르면 그런 조직이 세계에 75개가 있다고 한다”며 “행동경제학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미국에서 근로자의 퇴직연금(401k) 가입률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조언에 따라 2009년 미국 정부가 ‘선택가입’이던 퇴직연금 기본 옵션을 ‘자동가입’으로 바꾸고 근로자가 원할 때만 탈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귀찮아서 신청을 미루던 사람들이 대거 가입했다.
세일러 교수는 “경제 정책은 사람들이 바쁘고 정신없고 게으르다는 사실을 고려해 가능한 한 쉽게 설계해야 한다”며 “벽을 없애라”고 주문했다. 학자금 대출에 대한 세금 환급을 예로 들었다.
미국 학생이 대학에 지원할 때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학자금 대출서류를 작성하는 일이다. 이혼가정이 많은 미국에서 학생들은 누가, 어떻게 환급을 받아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정부는 대출부터 세금 환급까지 모든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세일러 교수는 “(모든 정보를 가진) 정부가 서류를 시시콜콜 작성하도록 할 게 아니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양자택일하도록 서류를 바꾸면 더 많은 학생이 대학교육을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주로 심리학자들로부터 아이디어를 ‘훔쳤다’”며 “기업, 정부가 내가 훔쳐 연구한 걸 보면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주류 행동경제학자의 고충
세일러 교수는 시카고대에서 13번째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교수가 됐다. 시카고대는 자유주의 주류 경제학파의 본산이다. 비주류인 그는 “총장과 학장, 대학원장이 나에 대해 말하며 ‘골칫덩어리’라고 얘기하지 않은 건 오늘이 처음일 것”이라며 시카고대에서 몸담아온 일을 “터프 러브(힘든 사랑)”라고 표현했다. 2013년 노벨경제학상을 탄 유진 파마 시카고대 교수와 20여 년간 논쟁해왔는데 “이제는 (그와 친해져) 골프코스에서 논쟁한다”고 말했다.
세일러 교수는 ‘주류경제학에서 행동경제학을 수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경제학자들은 잘 수용하지 않는다”고 잘라말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 생각을 바꾸는 건 어렵다”며 “난 아직 생각이 굳지 않은 젊은이들을 더럽히기로 했다”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노벨상 상금(900만스웨덴크로나·약 12억7000만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란 질문에 자신이 ‘심리적 회계(mental accounting)’ 이론을 개발했음을 상기시켰다. 같은 만원짜리를 사더라도 현금을 내려면 신용카드로 사는 것보다 많게 느껴지는 등 상황에 따라 같은 액수의 돈도 달리 느낄 수 있다는 이론이다.
세일러 교수는 “앞으로 돈을 쓸 때마다 ‘노벨상 상금 받은 돈이야’라고 말하겠다”고 익살스럽게 답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