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가볍고 빠른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입력 2017-10-09 17:21
무한경쟁 시장이 중국의 강력한 경쟁력
제조 외주화하고 특화기술에 주력해야

박래정 < LG경제연구원·베이징대표처 수석대표 >


러스(樂視)는 중국에서 동영상 서비스가 태동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창업했다. 불법 복제 동영상이 판치던 시절 정식 판권을 모아 지명도를 높인 이 회사는 2009년 무렵 TV 하드웨어 시장에 도전해 기존 가전업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기능이 거의 같은 TV를 5분의 3 가격에, 그것도 자사의 콘텐츠를 ‘미끼 상품’으로 붙여 판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듬해 증시에도 상장했고, 나아가 ‘중국의 테슬라’를 꿈꾸며 전기차 시제품도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자금난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증시에 간간이 흘러나오다 최근엔 도산까지 거론되고 있다. 비슷한 사업모델을 내세운 후발기업이 대거 출현한 때문이다.

모바이크(mobike)는 지난해 4월 출범한 공용자전거 선도업체다. 도심 어디서나 위성위치추적시스템(GPS) 기반으로 자전거를 빌리고 탄 뒤 ‘팽개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저렴한 가입비에 이용요금도 거의 공짜다. 그러나 사업 개시 1년 만에 중국 전역에서 적어도 25개의 경쟁 업체가 생겨났다. 대도시의 공용자전거가 1600만 대를 넘어서고 형형색색 자전거가 도심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흉물로 떠오르자 지방 정부마다 규제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창업한 중국 민영기업은 모두 553만 개, 하루에 1만5000개꼴이다. 553만 명의 창업자는 적지 않은 종자돈을 지출하면서 정밀한 셈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혁명기 홍위병을 연상시키는’ 창업 열풍 속에서 자신이 눈여겨본 틈새영역이 혼자만의 시장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돈 되는 시장, 수지맞는 비즈니스 모델일수록 경쟁자를 쉬 불러 모은다. 한 지역에서 성공했더라도 13억 시장 단위의 진입장벽을 세우긴 제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쉽지 않다.

그래서 최근 중국 재계에서 유행하는 것이 경(輕)자산 경영이다. 간단히 말해 제조 및 판매를 외주화하고, 자사는 연구개발이나 마케팅 등에 주력하자는 것이다. 대규모 자산을 줄여 자본 효율을 높이고 몸집을 가볍게 하려는 전략이다. 항상 경쟁에 노출된 중국 기업들의 경영 스피드를 높여 생존성을 제고하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 기업의 중국 시장 전략은 느리다 못해 위태롭다. 대개 중국 시장에 생산거점을 마련하는 초창기부터 연구개발과 기획 기능은 한국 본사가 책임져왔다. 시장 대응에서 한 박자 뒤질 수밖에 없어 생산거점의 현지 시장 경쟁력은 몇 년 새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미국과 유럽 기업은 최근 나름 제조 노하우를 갖춘 중국 기업을 찾아 제조 분야를 외주화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은 외려 중국 기업의 경쟁력에 밀려 위기를 맞은 한국 제조라인의 생존이 더 화급한 이슈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 기업을 괴롭힌 중국 기업의 경쟁력은 저렴한 인건비에서 나왔다. 그러나 강한 원가 경쟁력을 지닌 기업도 몇 년 못 가 넘어지고 후발기업이 소비자 취향에 더 잘 맞는 사업모델을 들고나오는 게 2010년대 경쟁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대개 가볍고 빠른 기업들이 생명선을 유지하면서 업종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중국 시장의 경쟁 양상이 ‘싼 것’ 일변도에서 특화기술 및 감성 가치를 따지는 쪽으로 바뀌고 있고, 불과 1년 뒤 사업 환경을 점치기 어려워진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한 해 500만 명 이상을 신규 경쟁자로 받아들이면서 업계 최대 기업도 불과 1~2년 새 도태시킬 수 있는, 13억 명이 벌이는 ‘무한경쟁 시장’이 중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 아닐 수 없다. 중국 기업들의 내수 경쟁이 밖으로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다가가는 지금, 바로 옆 한국 기업들이 이 경쟁의 포화를 피해갈 방도는 없어 보인다.

박래정 < LG경제연구원·베이징대표처 수석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