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현행대로 유지하는 게 좋다던 정부가 결국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FTA 개정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발언이 단순한 엄포가 아닌 실질적 위협으로 판단했고, 북한 도발로 인해 한·미 공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당당하게” 외쳤지만…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열었다. 공동위 특별회기는 FTA 개정 협상이 필요한지를 따지는 일종의 ‘사전 회의’다.
산업부는 협상 후 보도자료에서 “논의 결과 양측은 한·미 FTA의 상호호혜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FTA의 개정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했다”며 “‘통상조약의 체결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경제적 타당성 평가·공청회·국회보고 등 한·미 FTA의 개정 협상 개시에 필요한 제반 절차를 착실히 진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산업부는 지난 8월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공동위 특별회기 직후에만 하더라도 “우리 측은 급할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FTA 개정 협상을 즉시 진행하자고 요구했지만 산업부는 “양측 전문가들이 FTA의 효과와 미국 무역수지 적자의 원인에 대해 조사, 분석, 평가해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김 본부장은 “미국 측에서는 조속한 개정 협상을 제의했지만 우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미국 측 요구에) 당당하게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약 열흘 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 폐기를 준비하도록 참모들에게 지시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1차 공동위 특별회기 결과에 매우 불만을 나타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그러나 폐기 발언 하루 만에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한반도 안보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폐기 논의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과 동북아 정세 등을 고려했을 때 한미 동맹에 금이 가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외교·안보 진용의 문제 제기 등에 따라 한·미 FTA 폐기 카드를 잠시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본부장은 “최근 미국 방문을 통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하겠다’는 서한까지 다 작성했던 것을 확인했다”며 “폐기 위협이 실제적이고 임박해 있다. 블러핑(엄포)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한반도 안보 상황이 트럼프의 한·미 FTA 폐기 위협을 일시적으로 막았지만, 한국 정부가 이를 방어수단으로 계속 활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는 “개정 협상에 앞서 한·미 FTA의 효과부터 분석하자”는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며 미국 요구를 수용한 모양새가 됐다. 한반도 정세와 미국 측 압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개정 절차는
김 본부장은 이날 회의 후 “다음주 국회에 보고, 설명하고 (개정 협상) 개시를 위한 절차를 밟는다”라고 설명했다. 양측이 FTA 개정에 사실상 합의함에 따라 양국은 각각 내부 절차를 거치게 된다. 한국은 통상절차법, 미국은 무역촉진권한법(TPA)이 근거다.
한국은 이날 산업부가 언급한 것처럼 ‘양측 개정 합의’가 이뤄지면 이후 우선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한 뒤 공청회를 개최한다. 이후 통상조약체결 계획을 수립하고 대외경제장관회의를 거쳐 국회에 보고한 뒤 개정 협상 개시를 선언할 수 있다.
미국은 협정의 일부만 개정할지 전체를 개정할지를 두고 의회와 협의를 통해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미국은 ‘한·미 FTA 이행법’ 상 대통령에게 협정 개정 권한이 있으나 일부만 개정할 경우에도 ‘통상 협정 협상 및 체결 권한’은 원칙적으로 의회에 있기 때문에 의회와 협의를 해야 한다.
협정을 전면 개정할 경우에는 절차가 더 까다로워진다. 미국 정부는 협상 개시 90일 전에 의회에 협상 개시 의향을 통보해야 한다. 연방관보 공지, 공청회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고 협상 개시 30일 전에는 협상 목표도 공개해야 한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양측은 개정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하게 된다. 한국과 미국이 협정 개정 내용에 합의하게 되면 양측은 다시 국내 절차를 밟게 된다. 이후 양측이 합의한 날에 개정 협정은 발효된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전면 개정을 할 경우 국회 비준(한국), 의회 승인(미국) 등 양국 모두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손을 보는 일부 개정 절차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만약 원만하게 개정 협상이 이뤄지지 않아 협정을 폐기할 경우에는 한쪽의 서면 통보만으로도 가능하다. 한·미 FTA는 다른 쪽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면 통보한 날로부터 180일 이후 협정이 자동 종료되기 때문이다. 협정이 종료되면 양국 간의 특혜관세는 즉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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