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도심 숲길

입력 2017-10-01 16:06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황금연휴 초입에 비가 내린다. 지금쯤 모두 고향에 닿았을까.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상념에 젖는다. 도심의 가로수 잎도 빗방울에 젖는다. 박재삼 시인은 ‘비 듣는 가을 나무’라는 시에서 ‘슬픔 많은 우리의 마음의 키들이/ 비로소 가지런해지는고나’라고 노래했다. 이 비 끝으로 가을이 금방 붉어올 텐데, 멀리 가지는 못해도 도심 숲길로 산책을 나서보자.

인왕산 자락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 고즈넉하다.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배경이 된 곳으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숲속 길이 정겹게 굽이지고, 정자와 바위 사이로는 물길이 맑게 흐른다. 사직단 입구에서 수성동 계곡을 거쳐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까지 3.2㎞ 거리에 1시간30분이면 충분하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세검정 계곡숲길이 나온다. 홍제천 상류 세검정에서 숲이 울창한 백사실 계곡과 북악산 오솔길로 연결되는 코스다. 세검정 안내판에서 정선의 부채 그림 ‘세검정’도 만날 수 있다. 인근 북악 스카이웨이의 북악하늘길과 팔각정을 연결하는 산책로도 멋지다. 경복궁 서쪽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을 끼고 도는 효자로와 경복궁 동쪽의 삼청로~삼청공원,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돈화문로 또한 좋다.

노란 은행잎이 깔린 정동길은 전통의 데이트 명소다. 캐나다대사관 앞 550년 된 회화나무를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면 색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서대문구 안산도시자연공원에는 잣나무숲길과 숲속무대메타길이 펼쳐지고, 강북구 솔밭근린공원과 북한산 둘레길에는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동대문구 배봉산공원 황톳길에서는 신발을 벗고 맨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변 서초구 길마중길은 굵은 모래를 깔아 한 멋을 더한다.

관악구 관악로의 자작나무 가로수길과 강남구 대모산 둘레길, 서초구 양재천 영동1교와 2교 사이 ‘연인의 길’도 운치 있다. 하늘 높이 솟은 메타세쿼이아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곳도 많다. 서울숲과 상암 월드컵공원, 강서둘레길 2코스의 서남환경공원, 서초구 태봉로의 메타세쿼이아 산책로가 인기다. 홍익대 인근 경의선 철길과 공릉동의 경춘선 숲길공원에서도 도심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남산공원 순환로를 따라 활엽수와 상록수의 가을 정취를 느끼고 N서울타워에서 멋진 야경을 볼 수 있다. 남산도서관 옆 소월시비에 새겨진 ‘산유화’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호젓하게 남산길을 걸어보자. 이런 날 도심 숲에서 듣는 릴케의 가을 노래도 의미 있다. 가을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더욱 그렇다.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베풀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