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이야기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 김한슬기 옮김 / 21세기북스 / 616쪽 / 2만3000원
[ 서화동 기자 ]
1968년 1월23일 낮 12시 무렵 원산 앞바다. 해안선에서 24㎞ 떨어진 공해상에 있던 355t급 미국 정보수집용 군함 푸에블로호를 향해 북한 함정 한 척이 전속력으로 다가왔다. 곧이어 중무장한 북한 군함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푸에블로호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북한 해군의 전면 공격으로 결국 나포됐다. 선원 82명은 11개월 만인 그해 성탄절에 송환됐다.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오는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유엔군 총사령관 찰스 하트웰 본스틸 3세였다.
《태평양 이야기》를 쓴 저널리스트 사이먼 윈체스터는 이 장면을 두고 ‘아이러니’라고 했다. 그가 바로 38선을 긋도록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2차대전 항복 직후 소련이 급속도로 남하하자 미국은 당황했다. 그때 육군참모본부 장교였던 본스틸은 세계지도를 놓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까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선을 그어 보이며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 분할을 제안했다. 소련이 서울 바로 위에서 확장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본스틸의 제안을 받아들인 미국은 이를 소련에 전달했고, 놀랍게도 몇 시간도 안 돼서 소련도 이에 동의했다. 저자는 “본스틸이 별생각 없이 지도에 선 하나를 그으며 태평양에 갈등의 불씨를 지폈다”며 “참혹한 전쟁(6·25), 수천 번이 넘는 군사분계선에서의 총격전, 납치·습격·땅굴 파기 등 별별 사건이 일어났고 그중 하나가 푸에블로호 사건”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은 태평양 전체를 아우르는 현대사다. 1950년 이후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2014년까지 태평양 지역에서 일어난 현대사의 10가지 장면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고 변화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핵실험 경연장이 돼버린 바다, 대양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 1954년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발명과 세계무역의 변화, 태평양의 골칫거리 북한, 태평양 식민국가들의 독립, 기상이변으로 인한 초강력 태풍의 발생, 심해열수공의 발견과 태평양 해저자원 개발, 태평양에서 탄생해 몇 조원의 산업으로 성장한 서핑 등 다양한 이야기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옥스퍼드대에서 지질학을 전공한 저자는 컨데나스트 트래블러, 스미스소니언,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저명한 매체에 30년 이상 글을 써온 저널리스트다. 꼼꼼하고 폭넓은 취재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쉽고도 흥미롭게 풀어낸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보내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미국령 괌은 태평양의 마셜제도에 있다. 하지만 애초 태평양을 핵 실험의 경연장으로 만든 건 미국이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핵폭탄 개발 초기 네바다 사막의 지하에서 실험했던 미국은 1940년대 이후 마셜제도의 비키니섬과 콰절린환초 등으로 실험 무대를 옮겼다. 미국이 1945년부터 터뜨린 핵폭탄은 1032개에 달하며 이 중 초창기 실험 67번은 태평양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특히 비키니섬에서 이뤄진 23차례의 핵실험은 규모와 위력이 최대였다. 1950년 2월 원자핵융합 폭탄 실험 장면을 보자.
“오전 6시45분, 폭발이 일어났다. 폭탄이 터지고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지름 6.5㎞의 하얀 화염구가 생성됐다. 1분이 지나자 지름이 11㎞에 이르는 잔해 구름이 16㎞ 상공으로 솟구쳤다. 10분이 지나자 지름이 9.6㎞로 확장된 구름이 40㎞ 높이까지 올라갔다. 충격파는 비키니섬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미국뿐만 아니다. 영국은 1960년에 태평양 한복판의 키리바시공화국 키리티마티섬에서 현지인을 대피시키지도 않은 채 원자폭탄 실험을 감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방사능에 피폭됐고,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야 했다.
저자가 1950년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도 핵무기 개발의 결과다. 핵실험으로 방사능 오염이 심각해지면서 탄소연대측정의 기준이 되는 탄소 14가 대기 중 함유량이 급증하자 과학자들이 특정 날짜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측정된 값은 정확도가 높고, 그 이후 측정값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로 한 것이다. 그게 1950년 1월1일이며 이것이 과학에서는 ‘현대’의 시작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오늘날 태평양을 나타내는 항공모함이나 오염, 쓰레기 소용돌이, 산호탈색 현상 같은 단어가 사라지기를 희망하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서양은 동양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고요한 문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고 포용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이것이 바로 태평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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