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멈췄을 뿐 끝나지 않은 전쟁의 악몽
참전국들에 갚아나가야 할 빚 많은데
침략과 유린의 당사자들은 '적반하장'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
경기도 가평군에는 외국군 참전 기념탑이 많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군 전투 기념비가 세워져있고, 미군 참전 기념비도 있다. 이 일대가 6·25전쟁 당시 국군·유엔군과 북한군·중공군 간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격전지였음을 증언한다. 가평군청이 건립한 다른 기념비들과 달리, 미군 기념비는 민간인 단체(한국전쟁 맹방국 용사 선양사업회)에서 사비를 모아 세웠다. 참전용사를 기리는 제단 뒤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경구와 함께 전사한 미군 병사 명단을 새긴 대리석이 둘러서 있고, 앞에는 미 육군 40사단 엠블럼을 박아 넣은 비석이 놓여 있다.
‘샌드백 고지’ 등에서의 치열한 전투로 376명의 전사자와 1457명의 부상병을 낸 미 육군 40사단은 가평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지역 내 명문학교로 뿌리내린 가평고를 지어줬다. 북한 인민군 6개 사단 및 중공군 연합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1952년 초, 40사단장이었던 클리랜드 소장은 천막학교를 짓고 공부에 몰두하던 학생들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전쟁 포화 속에서도 학생들이 책을 놓지 않는 나라는 반드시 성공한다. 우리가 이들에게 학교 건물을 지어주자.” 그는 1만5000여 명의 사단 장병을 대상으로 ‘2달러 기부’ 캠페인을 벌였다. 장병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고, 3만1000달러(요즘 금액으로 60억원가량)가 모였다. 공병장교가 교사(校舍)를 직접 설계하고, 공병대원들이 투입돼 교실 10개와 강당 1개로 이뤄진 건물을 완공했다.
정식 개교를 앞두고 학교 이름을 고민하던 때, 클리랜드 사단장은 자신의 이름 대신 케네스 카이저 하사의 이름을 딴 교명(校名)을 제안했다. 가평고 전신인 ‘가이사(‘카이저’를 주민들은 그렇게 발음) 중학원’은 이렇게 문을 열었다. 학교 이름의 주인공 카이저 하사는 가평전투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 19세 나이에 세상을 등진, 40사단의 6·25전쟁 1호 전몰장병이었다. 장군은 이역만리 전쟁터에서 채 꽃도 피우지 못하고 떠나간 부하를 그렇게 기념했다.
장군과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매년 가평고 졸업식에 돌아가면서 참석해 군인연금을 쪼개서 조성한 장학금을 전달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65년 동안 받기만 한 가평고 학생들이 마침내 ‘작은 보은(報恩)’에 나섰다.
학생 대표 세 명이 몇 달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40사단 본부를 방문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행사를 열었다. 가족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아무도 찾는 이 없던 카이저 하사 묘를 찾아내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는 글귀의 카드와 함께 꽃다발을 바쳤다. 아흔 살을 눈앞에 둔 참전용사들을 만나 전쟁 당시를 회고하는 증언도 들었다. 수색대 선임병이던 노병은 가슴에 주렁주렁 단 훈장을 가리키며 “나와 함께 수색작전에 투입된 전우들은 모두 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영웅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저 살아남은 자일 뿐”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이 멈춘 지 6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참전용사들에겐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만 너무 빨리 잊은 게 아닌가,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가평고 학생 대표들은 그렇게 고백했다.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임을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소식이 최근 날아들었다. 종전 뒤 고국으로 돌아가 생을 마친 네덜란드의 참전용사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 씨가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어제 부산유엔공원으로 이송 안장됐다. 2년 전 프랑스 노병 레몽 베르나르 씨가 전우들 곁을 찾아온 이래 다섯 명째다.
우리는 잊어 가고 있는 6·25전쟁을 아직도 생생하게 가슴에 담고 있는 참전국 노병들에게 요즘의 한반도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전쟁의 참화를 일으켰던 북한이 또다시 “남조선을 깔고 앉겠다”는 망언을 공공연하게 내뱉고 있고, 그들과 함께 이 땅을 유린했던 중국은 북핵 위협에 대응한 한국의 사드 배치를 저주하며 온갖 보복을 자행하고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게 많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