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과자 해고지침 등 폐기한 정부
정규직노조 기득권 보호하겠다는 것
기회양극화 막고 고용유연성 높여야"
김태기 < 단국대 교수·경제학 >
국가의 흥망은 제도의 문제로 귀착된다. 열심히 일하면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혁신을 선택한 나라는 흥했고 혁신이 멈춘 나라는 쇠했다. 송나라 시절 종이 화약 나침반 발명 등으로 앞섰던 중국은 유럽에 뒤진 채 1000년을 보냈다. 유럽은 종이에 힘입어 문명을 꽃피우고 나침반과 화약으로 영토를 넓히며 국력을 키웠다. 중국은 유럽에 유린당했고 일본에도 짓밟혔다. 이유는 간단하다. 송은 조선 멸망의 원인이기도 했던 사농공상(士農工商)과 공무원에 대한 특권제도를 택했고 유럽은 정반대로 갔다. 현대적 의미로 송은 비즈니스를 천시하고 규제를 강화해 기업가정신을 해쳤고 유럽은 비즈니스를 숭상하고 기업가정신을 키웠다.
21세기에도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유럽의 병자’로 조롱받던 독일은 기득권에 눌린 청년 등 아웃사이더의 고실업과 장기실업을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제도혁신으로 해결해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유럽의 슈퍼스타’가 됐다. 관광자원이 풍부한 그리스와 스페인은 복지에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청년 실업률이 40%나 되는 초고실업국가로 추락했다. 프랑스는 독일처럼 개혁을 꿈꿨지만 우물쭈물하면서 청년실업률이 30%로 치솟았다. 제3세계 이론으로 한국 진보진영에 영향을 미친 브라질은 1980년대 중반 소득이 우리와 비슷했지만 특권사회의 함정에 빠져 뒤처졌다. 이로부터 30년 지난 한국은 쇠퇴해 청년실업률 30%를 바라본다.
소득양극화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기회양극화다. 노력하면 더 벌 수 있는 사회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기회가 차단된 사회는 절망이 판을 친다. 정부는 소득불평등과 소득양극화만 강조하고 기회불평등과 기회양극화에는 눈을 감고 있다. 한번 공무원이면 평생 공무원이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원은 평생직장이 보장된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옮기는 것은 정말 어렵다. 상하를 오가는 승강기는 고장났고 남아 있는 사다리도 위태롭기 짝이 없다. 고용이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의 문제로 변질돼 21세기 한국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기회의 나라에서 신종 신분사회의 나라로 퇴행했다.
정부는 재벌을 문제 삼아 왔다. 강성 노조의 힘도 빼려고 했지만 진보 정치세력이 반대해 왔다. 강성 노조가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에게 신분의 장막을 쳐주면서 신분사회를 만든 주역인데도 정부는 이들을 옹호하기에 바쁘다. 강성 노조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노조 가입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해도 모른 체한다. 재벌을 규제해도 강성 노조는 흔들리기는커녕 기회로 삼아 파업을 일으켜 한몫 챙기고 특채로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일도 한다. 이래서 진보 정치세력은 강성 노조와 한 배를 타고 신분사회를 만든다.
정부가 노동개혁 양대 지침 폐기를 발표했다. 노동개혁 실종과 신분사회 도래 선언으로 들린다. 양대 지침은 성과연봉제 폐지 등으로 사실상 폐기됐는데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강성 노조에 잘보이려는 시늉으로 보인다. 양대 지침은 강성 노조가 반대한 것으로, 공정인사지침과 취업규칙지침을 말한다. 공정인사지침은 저성과자가 교육·직무 재배치 후에도 성과가 나지 않을 때 해고가 가능하고, 취업규칙지침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사용자의 취업규칙 변경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지침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강성 노조의 기득권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인데도 폐기하면서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않았다.
일국의 국민소득은 사람들이 일할 기회가 얼마나 되고 능력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가에 좌우된다. 기업이 고용을 늘리고 근로자가 생산성을 높이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부의 임무다. 따라서 정부는 기회양극화에 따른 신분사회를 막기 위해 기득권의 고착화를 저지하고 재벌의 횡포뿐 아니라 강성 노조의 횡포를 규제해야 한다.
김태기 < 단국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