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한적한 산골마을 한 켠에서 매일 서 너 차례 돼지들의 달리기 경주가 벌어진다. 축사를 나온 돼지들은 출발을 외치는 신호가 떨어지면 연못을 돌고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구름다리와 미끄럼틀까지 통과하고 나면 결승선이다. 정해진 코스를 돈 돼지들은 마당에 나와 아이들과 어울린다. 아이들은 먹이를 던져주며 즐거워하고, 돼지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을 누빈다. 원주의 대표적인 체험 관광지인 ‘돼지문화원’ 풍경이다.
돼지문화원을 운영하는 장성훈 대표(56)는 스스로를 ‘6차 산업 전도사’라고 부른다. 장 대표는 1997년 돼지농장 운영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2011년 돼지문화원을 열었다. 농장에선 돼지를 기르고(1차 산업), 가공공장에선 소시지와 돈가스를 만들며(2차 산업), 돼지문화원에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3차 산업). 이를 다 더하거나 곱하면 생산·가공·체험을 한데 묶은 6차 산업이 된다.
돼지농장에서 기른 돼지를 판매해 거두는 1차 산업 연 매출은 약 200억원. 가공식품과 체험 프로그램으로 벌어들이는 2차, 3차 산업 매출은 각각 50억원 가량이다. 균형잡힌 6차산업 구조를 갖추고 있다.
장 대표에게 6차 산업의 성공 비결에 대해 물었다. 그는 강연 기회가 있을 때나 후배 농업인들이 조언을 구할 때 꼭 이야기해주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했다.
1. 핵심은 1차 산업, 근간을 다져라
장 대표는 “6차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차 산업”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1차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생산물 유통에 대한 노하우와 지식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1차 산업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6차 산업은 1차 산업에 기초하고 있기에 1차 산업이 없으면 6차 산업도 없다는 것이다. 멋부리거나 한탕주의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정부가 6차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정부 보조금과 지원금을 노리는 기획 창업이 늘고 있다고 그는 꼬집었다.
장 대표는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은 6차 산업 기업들은 정부 지원금이 끊어지면 바로 어려움을 겪는다”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본업을 철저히 지키며 신중히 접근하는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돼지문화원의 가공식품이 인기를 끄는 것은 돼지 자체의 품질이 좋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장 대표의 브랜드인 치악산 금돈은 금보 육종이라는 종돈회사가 육성한 품종이다. 인공수정센터에서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품종이다. 장 대표는 “160일 만에 키우는 속성 사육 대신 2~3주 정도 더 키우며 200일까지 키워 육질을 개선했다”며 “서비스와 체험 등은 열심히 노력하면 어느정도는 따라올 수 있지만 근본적인 제품력은 다른 곳들이 따라오기 어렵다고 자부한다”고 했다.
장 대표가 이런 이야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돼지농장에서 일하며 1차 산업을 ‘제대로’ 배웠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국내 유력 종돈기업 중 하나인 다비육종에 입사하며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종돈기업은 일반 축산기업이 어미돼지로 활용할 수 있는 돼지를 육성한다. 그는 이 회사의 종자돼지 영업부장을 지냈다. “돼지를 직접 돌보는 일부터 우수한 정액을 가져와 좋은 종돈을 육성하는 일까지 많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6차산업의 가능성을 본 것은 1992년, 우수 사원으로 뽑혀 일본 연수를 가게 된 게 계기다. “사이보쿠현에 있는 돼지농장으로 연수를 갔어요. 농장을 하던 곳에 갑자기 온천이 터진 거에요. 사람들이 찾아오니까 자연스럽게 돼지고기 식당을 운영하게 된 것을 보며 1차 산업이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것도 좋은 사업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 대표는 1997년 다비육종을 나와 돼지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사이보쿠에서 느꼈던 사업 모델은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창업 후 바로 터진 외환위기 탓이다. 당장의 돼지 농장을 건사하는 것도 힘들던 시기였다.
그가 치악산 금돈이란 브랜드를 만들어 소비자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10년이 넘게 지나서야 그는 6차 산업에 한걸음 다가갔다. 원주 시내에 50석 규모의 식당을 마련했다. 그러다 2011년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퍼지면서 돼지를 대량으로 묻었다. 이를 계기로 사업 다각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돼지문화원이다. 80억원 가량을 들여 건물을 올리고 직원을 뽑았다. “큰 투자를 해 다 갖춰놓기만 하면 잘 될 줄 알았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2. 과욕을 부리면 안된다. 시작은 소규모로 해보면 어떨까
2011년 돼지문화원의 직원은 40명이었다. 1층 커피숍에만 3명의 직원을 뒀다. 서비스업을 하려면 직원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건비 등의 영향으로 매달 적자가 쌓여갔다. 분명 40명의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일을 하는데 적자폭이 커졌다. 적자가 쌓여가는 장부를 보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감원이 시작됐어요. 30명 정도로 줄이면 될까 싶었는데 나중에는 20명까지 줄였습니다. 10명이 줄면 연 10억원을 절약하는 셈이더라고요. 그런 계산이 전혀 안된 채로 규모만 키워놨던 것이지요.”
지금도 돼지문화원에는 식당 직원을 포함해 22명이 일하고 있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생을 더 고용하지만 기본적으로 20여명이 정직원이다. 첫해 3명의 직원을 둔 커피숍도 지금은 무인(無人)으로 운영한다. 그는 “50억원 매출에 20여명이 딱 적당한 규모인 것 같다”고 했다.
가공 공장을 짓고, 소시지 제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2012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소시지에 카레도 넣고, 청양고추도 넣고, 총 7가지 맛의 소시지를 팔려고 했었죠. 그런데 종류가 많으니까 재고 관리가 안 되는 거에요. 어떤 제품은 부족하고, 어떤 것은 모자라는 일이 발생했죠. 역시 안 되겠다 싶어서 소시지 수도 절반 가까이 줄였습니다. 지금은 단 네 종류만 팔아요.”
메뉴 종류도 비슷한 절차를 거쳐 줄었다. 야심차게 시도했던 핫바와 베이컨은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 대신 돈가스와 소시지, 육포에 집중했다. 그가 여러차례의 시행착오에서 겪은 것은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했던 그는 6차 산업을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돼지문화원 같이 큰 사업으로 시작하지 말라”고 한단다. 투자를 크게 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대규모로 투자하면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지는 등 어려움이 찾아올 때 버티지 못할 수 있다고 장 대표는 설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6차 산업 형태는 가족농이다. 장 대표는 “장인정신을 갖고 있는 농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 경영 형태가 적합한 6차 산업의 사업 모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 노동력을 중심으로 사업체를 운영해 연 매출 5억원 정도를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덧붙였다.
3. 일반 제품보다 50% 비싼 제품 만들어라
돼지고기는 흔한 식품이다. 지난해 국내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24.1kg. 식당에서 삼겹살 1인분이 150~200g이라는 점을 고려해 단순 계산하면 1년에 약 120~160끼를 돼지고기를 먹은 셈이다. 부위도, 요리법도 다양하다.
수많은 돼지고기와 돼지고기 가공품 속에서 6차 산업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장 대표는 대기업 계열의 축산회사들이 쏟아내는 물량과 직접적으로 경쟁해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시장에 들어가면 안 돼요. 차별화를 해야 합니다.”
차별화는 가격인데 의외로 더 비싸게 팔아야 한다는 지론이 나왔다. 장 대표는 “대기업 제품보다 50% 비싼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살 길”이라며 “소규모로 생산하되 품질과 아이디어를 더해 소수의 단골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장 대표는 돈가스를 예로 들었다. “일반적으로 돈가스 가공품에는 배터믹스가 들어갑니다. 돼지고기에 배터 믹스를 바르고, 빵가루를 더해 만드는 거죠. 그런데 저희 돈가스에는 배터 믹스 대신 현미 가루를 씁니다. 배터 믹스는 인공적으로 혼합된 공산품이기 때문에 돈가스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현미 가루를 주목하게 됐습니다. 이 방법이 지금은 특허 등록돼 있습니다.”
소시지 제조 과정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소시지 내용물을 품질 좋은 돼지고기로 하겠다는 것은 이미 정해 놓은 상황이었지만 소시지를 담을 케이스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콜라겐으로 만든 인공 용기를 쓰는 방법과, 돼지의 소장을 활용하는 방법 사이에서 장 대표는 돼지 소장을 택했다. “가격은 콜라겐 용기가 훨씬 쌌죠. 경우에 따라 내용물보다 돼지 소장 값이 더 비쌀 때도 있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씹는 맛이나 영양을 생각했죠.”
체험 농장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곳. 일본 모꾸모꾸 농장 얘기가 이번에도 나왔다. 장 대표도 모꾸모꾸가 부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 대표의 관점은 조금 달랐다. “모꾸모꾸가 부러운 것은 잘 꾸며놓은 체험장도, 돼지고기로 만드는 가공식품 기술도 아니에요. 소비자들이 그들이 만드는 제품에 거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준다는 점이 부러워요.”
장 대표에 따르면 모꾸모꾸는 축산업이 기반이지만 맥주와 와인, 빵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든다. “사실 축산 농가가 빵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조금 뜬금 없잖아요. 하지만 그들의 철학과 농장 운영방식, 명성 등을 고려하면 그들이 만든 빵도 훌륭할 것이라는 생각이 소비자들에게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장 대표도 돼지문화원을 그런 곳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하우스 맥주, 와인, 감자떡을 개발해보고 싶어요. 신뢰받는 기업이 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주=FARM 강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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