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핵보다 무서운 EMP탄

입력 2017-09-18 18:13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962년 7월 하와이 오아후섬 일대 전자장비가 일시에 마비됐다. 가로등과 교통신호등이 꺼지고 통신시설도 먹통이 됐다. 라디오마저 켜지지 않았다. 비밀은 3년 뒤에야 풀렸다. 뜻밖에도 1400㎞ 떨어진 태평양 존스턴섬 상공의 핵폭발 실험이 원인이었다. 이때 나온 강력한 전자기파가 하와이의 전자기기들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수백㎞ 바깥의 다른 지역 케이블 손상도 이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러시아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적의 통신·전력 시스템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EMP(Electro Magnetic Pulse·전자기파) 폭탄을 개발했다. EMP는 강력한 전자기장을 순간적으로 뿜어내 전자회로를 파괴함으로써 모든 전자통신 장비와 전산망, 교통수단 등을 못 쓰게 한다. 핵폭발 없이 전자기파만 방출하는 비핵 EMP탄도 있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 규모와 비슷한 100kt급 EMP탄 한 방이면 한국의 모든 전자통신망이 무용지물로 변한다. 세계 최고 정보통신기술(ICT)을 자랑하는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EMP탄의 폭발 위력은 고도가 높을수록 크다. 20kt급도 157㎞ 상공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발휘한다. 요격고도 40~150㎞인 사드로는 막을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지구자기장 때문에 EMP탄의 영향력이 적도 방향으로 쏠린다는 점이다. 휴전선 근처에서 터져도 남쪽에 피해가 집중된다는 얘기다. 북한이 접경지역의 북쪽 영공에서 터뜨릴 경우 한·미 양국이 핵 공격으로 간주하고 즉시 보복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제기된다. 전자장비가 마비된 한국군을 상대로 북한군 탱크가 밀고 내려온다면 서울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미국 중북부 400㎞ 상공에서 메가톤급 폭탄이 터지면 미 본토 대부분이 피해를 본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있다. 제임스 울시 전 미국 중앙정보국장은 “북한이 미국을 공격하는 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대신 EMP탄을 쓴다면 핵무기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인공위성에 장착한 EMP탄은 지구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북한은 궤도위성인 광명성 3호와 4호를 갖고 있다.

EMP탄 대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주요 거점별로 방호체계를 갖추고 있다. 군사 장비도 EMP 테스트를 통과해야 전장에 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일부 방호체계도 합참 등 주요 지휘부에 국한돼 있다. 국민은 무방비 상태다. 사흘 전 북한 미사일에 맞서 우리 군이 ‘현무2’ 두 발을 쏘아 올렸지만 한 발은 발사 직후 추락하고 말았다. “북한을 재기불능으로 만들 힘이 있다”는 정부의 호기와 달리 아직은 이런 게 우리 현실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