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다산, 저술가 이전에 엔지니어였다

입력 2017-09-14 19:26
수정 2017-09-15 05:48
엔지니어 정약용

김평원 지음 / 다산초당 / 316쪽 / 1만8500원


[ 마지혜 기자 ] 다산 정약용에게는 으레 ‘18세기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학자’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행정기구 개편 원리 등을 제시한 ‘경세유표’와 목민관의 지침을 서술한 ‘목민심서’, 살인사건 심리를 위한 형법서 ‘흠흠신서’ 등을 저술한 업적이 그 근거처럼 제시된다.

《엔지니어 정약용》은 정약용을 조선의 엔지니어로 재조명한다. 김평원 인천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썼다. 정약용의 업적을 토목·건축·도시·기계·자동차·조선 공학 등 여섯 개 분야로 나눠 구체적으로 들여다봤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 다양한 건설기계를 발명했다. 본격적으로 책을 집필한 것은 정조 사후 관직에서 내몰려 유배 생활을 할 때부터다. 저자는 “인문사회분야 전문가들이 이공계 학자들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학’이라는 분석의 틀을 설정하고 정약용을 본 면이 있다”고 말한다.

정약용이 엔지니어로서 기량을 처음 발휘한 과업은 1795년 ‘한강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였다. 이때는 정조 즉위 20년이자 혜경궁 홍씨의 회갑인 해였다. 정조는 성대한 행사를 계획했다. 행사는 많은 인원이 한양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동하는 원행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1000명에 이르는 인원이 동시에 한강을 건너야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겼다.

정약용은 36척의 배를 이용해 340m 길이의 배다리를 설계한 뒤 현대의 아치교와 비슷한 방식으로 정렬해 상부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수위 변화에 선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100년 뒤에야 만들어진 군산 부잔교에 사용된 부판 방식을 제안했다.

정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정약용은 당시 신도시라고 할 수 있는 수원 화성 설계를 맡았다.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한 도시를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기대에 부응해 화성에 이른바 ‘경제의 길’을 조성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재화와 화폐가 팔달문(남문)으로 들어와 화성 중심 도로에 형성된 상점을 통한 뒤 장안문(북문)을 이용해 서울로 나가도록 설계했다.

화성 공사일지를 보면 한 건물의 공사는 보통 두 달 내에 빠르게 끝났다고 한다. 정약용은 가장 중요한 건축 자재인 돌의 크기를 표준화한 뒤 부석소에서 미리 가공하도록 했다. 그리고 현장에 옮긴 뒤 바로 조립했다. 벽이나 천장, 기둥, 보 등을 공장에서 미리 제작해 운송한 뒤 현장에서 조립해 빠른 시간에 건물을 짓는 오늘날의 ‘PC 공법’과 비슷하다.

저자는 정약용이 복합도르래의 원리로 거중기를 개발한 데서 그의 기계 공학자적 면모를 읽는다. 크레인과 수레의 기능을 통합한 유형거를 발명하고 하중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거더(교량의 보)교 형태로 배다리를 만든 데에선 자동차공학과 토목공학자의 흔적을 본다. ‘실학자’ 정약용이 ‘조선 근대 공학의 개척자’로 새롭게 다가온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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