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논점과 관점] 누가 북한을 이렇게 만들었나

입력 2017-09-05 18:22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하고, 강도가 훨씬 세진 6차 핵실험까지 하면서 국민들은 두 가지 심정이 교차할 것이다. 하나는 핵을 실은 북한 미사일이 언제 우리 머리 위로 날아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또 하나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국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의구심이다.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햇볕정책’ ‘비핵개방 3000’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 온갖 정책이 나왔음에도 북한 핵·미사일 개발을 왜 못 막았느냐는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 사실이 미국 정보당국에 포착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그 이후 약 30년간 북한은 줄기차게 핵 개발을 진전시켰다. 한국에서 진보, 보수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상관하지 않았다. 제재 국면에서 속도조절은 있었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친 핵 야욕은 꺾이지 않았다. ‘핵 보유국’ 목표는 반드시 관철해야 할 김일성의 유훈이 됐으며 김정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와 있다.

매번 '동결'… 북한 핵야욕 못 꺾어

그럼에도 한국과 미국은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가 아니라 ‘동결’ 수준에서 해법을 찾았다. 어떻게든 한반도에서 위기가 부각되지 않는 ‘현상유지’에 그쳐 북한이 언제라도 핵 개발을 재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북한은 합의 이후에도 뒤에서 핵·미사일 개발을 지속했고, 전략적 시기를 택해 공개적인 도발을 해왔다. ‘도발→대화→합의→도발’이라는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지속적으로 고도화됐다.

‘미완의 해법’은 미국과 북한이 핵 문제와 관련해 처음으로 마주 앉은 1994년 제네바 합의 때부터 시작됐다. 한국과 미국은 북핵 동결 조건으로 북한에 경수로 형태의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주고, 매년 중유 50만t을 지원하기로 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2·13 합의문에도 북핵 동결·경제 지원 내용이 담겼다.

2000년 6월과 2007년 10월 두 차례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에선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평양에서 돌아와 “한반도에 전쟁 위협은 없다”고 단언했다. 또 “북한은 핵 개발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장담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북한의 핵·미사일은 협상용”이라고 했다. 이런 ‘낙관론’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5㎿ 원자로 재가동, 핵·미사일 도발 지속으로 여지없이 깨졌다.

미사일 방어망 하나 구축 안해

그럼에도 한국은 미사일 방어망 하나 구축하지 않았다.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계 편입 논란 때문이라고 하지만, 과연 절실하게 노력했는지 의심스럽다. 노무현 정부 때 하층 방어 능력만 갖춘 패트리엇2(PAC2) 미사일을 들여오는 데 그쳤다.

보수 정권이라고 해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 징후 시 선제타격한다는 개념의 ‘킬 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 구상을 내놨지만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때도 적극적인 추진 의지를 나타내지 않았다. 국방예산 증가율은 노무현 정부 시절 평균 8.9%에서 이명박 정부(5.2%)와 박근혜 정부(4.1%) 때는 더 낮아졌다.

문재인 정부와 미국 트럼프 정부는 그간 혼란스러운 대북 메시지를 쏟아냈다. 강경론과 대화론이 뒤섞이면서 김정은에게 잘못된 신호를 줬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33세 독재자의 손에 무시무시한 핵·미사일이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적당한 타협에 머무르지 말고,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유지해야 한다. 더 이상 지난 30년의 과오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