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윤 기자 ]
지난 1월21일 독일 서부 도시 코블렌츠에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FN) 대표, 헤이르트 빌더르스 네덜란드 자유당 대표 등 유럽 극우정당 수장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르펜 대표는 “2016년 앵글로 색슨 세계가 깨어났다. 올해는 유럽대륙이 깨어날 것으로 확신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올해 네덜란드 총선과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극우정당은 잇따라 패했다. 이달 독일 연방의회선거에서 독일대안당(AfD)이 의회 진출에 성공하느냐가 위축된 유럽 극우정당의 앞날을 결정할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극우정당, 이민 확대 반발하며 세력 키워
유럽의 극우정당은 19세기에도 존재했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극단적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했다. 지지세를 확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다. 유럽 국가들이 중동 아프리카 등지의 이민자를 적극 받아들인 것이 계기가 됐다. 특히 2001년 미국에서 알카에다가 주도한 9·11 테러가 발생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불황이 닥치면서 이민자에 대한 유럽인의 반감이 커졌다. 이는 이민 반대 및 인종주의를 앞세운 극우정당의 지지율을 밀어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반(反)이민 정서를 등에 업고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결정되고, 이어 백인 우월주의를 기반으로 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유럽 극우정당들은 집권을 넘보는 세를 얻었다. 상당수 극우정당 지도자는 자신들이 ‘유럽의 트럼프’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EU 탈퇴를 위한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유럽 국민의 반EU 정서를 파고들었다. 올해 초 지그마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는 “유럽 국가들의 선거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집권하면 EU는 붕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실은 딴판이었다. 지난 3월 네덜란드 총선에서 극우정당 자유당은 20석을 얻는 데 그쳐 33석을 차지한 자유민주당에 이어 제2당에 머물렀다. 5월 프랑스 대선에서도 르펜 국민전선 후보는 중도신당 후보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패했다.
영국의 혼란·트럼프 외교혼선에 주춤
노무라홀딩스 조사에 따르면 2016년 30%에 달한 유럽 극우정당 지지율은 최근 23%로 추락했다. 독일대안당 지지율은 연초 15%였지만 지금은 8%로 반토막 났다. 반면 EU 체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지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36%이던 지지율이 42%로 반등했다. 극우정당에 열광하던 유럽인들이 등을 돌린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고립주의를 내건 트럼프 정부가 출범 이후 보여준 난맥상과 브렉시트 결정 이후 영국이 겪는 혼란이 촉매가 됐다.
유럽인들 사이에서 “고립주의는 나쁜 정책”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기가 올 들어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강한 회복세를 타자 극우주의자의 지지 기반이 약해졌다는 시각도 있다. 이 같은 상황 급변에 유럽 극우정당들이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의원 후보였던 에르베 드레피노는 “극우정당들이 EU 탈퇴를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극우정당 다시 득세할 가능성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에서 극우정당이 다시 득세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 경고했다. 극우정당 지지율이 하락했지만 수년 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24일 치러지는 독일 총선에서 독일대안당이 어느 정도 의석을 확보할 것인지가 최대 관심사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극우정당이 연방의회에 진출한 적이 없다.
아돌프 히틀러의 극우정당 나치로부터 받은 독일 국민의 트라우마는 상당하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독일대안당이 예상 밖 선전을 펼치면 극우주의 바람이 다시 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내년 초 치러질 전망인 이탈리아 총선에서 극우정당 오성운동이 제1당으로 부상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김동윤 한국경제신문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