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정치다" 주장 파문
"판사들의 정치성향 존중해야 자신만의 법 해석 가질 수 있어
대법 판결도 남의 해석일 뿐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 없어야"
"이런 생각 자체가 법관의 오만"
"자의적 해석이 판사 양심 아냐…오직 법에 따라 재판하라는 의미
대법까지 무시…신뢰만 흔들뿐"
[ 고윤상 기자 ] 현직 판사가 ‘대법원 판결은 남의 해석일 뿐’이라는 취지의 글을 법원 내부게시판에 올려 파장이 일고 있다. 법원 내 소위 ‘진보성향’ 판사들 모임으로 알려진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던 이 판사는 ‘재판은 곧 정치’라고도 했다.
‘판사는 자신의 가치와 정치적 성향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파격 주장에 법조계에서는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재판은 정치’라는 파격 주장
오현석 인천지방법원 판사(40·사법연수원 35기)가 법원 내부망인 인트라넷 게시판에 ‘재판과 정치, 법관 독립’이라는 글을 올린 것은 지난 30일이다.
오 판사는 “정치와 무관한 진공상태에서 사법 고유영역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고착시키며 정치색이 없는 법관 동일체라는 환상적 목표 속에 안주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엄혹한 과거 군사정권 시절 법률 기능공으로 자기 역할을 스스로 축소시켜 놓고 근근이 살아남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 됐을 것)”이라는 나름의 분석을 달았다.
그는 이어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며 “존경할 만하게 보이는 훌륭한 법관이라 하더라도 정치 혐오, 무관심 속에 안주하는 한계를 보인다면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판사의 정치적 성향을 존중해야 한다고도 했다. “판사들 저마다의 정치적 성향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제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판사 개개인은 고유한 세계관과 철학 그 자신만의 인식체계 속에서 저마다의 헌법 해석, 법률 해석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상식을 반성하고 통념을 극복할 기회를 제공해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한 판사는 “자신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라는 오만이 읽힌다”며 “이런 글을 법관이 썼다는 자체가 놀랍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보다 판사의 법해석이 우선”
오 판사는 헌법도 언급했다. “판사는 양심껏 자기 나름의 올바른 법해석을 추구할 의무가 있고 그 자신의 결론을 스스로 내리려는 취지가 헌법 제103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하지만 이는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의견이 많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조항이다. 헌법과 법률을 가장 우선적으로 따르라는 주문이다. 한 부장판사는 “정치적 성향이나 판사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오직 법률에 의해 판단하라는 취지”라며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조항을 왜 멋대로 정반대로 해석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오 판사는 대법원의 해석을 ‘남의 해석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는 “(헌법은) 면밀히 말하면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의 해석, 통념, 여론 등을 양심에 따른 판단 없이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명령”이라며 “법관의 독립을 인정하다면 다소간의 차이와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 자리가 진리가 된다)’이란 고사성어도 인용했다.
오 판사가 게시한 글에 설민수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정치적 표현은 보장돼야겠지만 만일 그 논의가 법관이라는 지위와 결합됐을 때는 그런 논의조차 삼갈 필요가 있다”는 답글을 달았다. 이 답글에는 ‘동의한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한 부장판사는 “대법 판결까지 무시하자는 식의 주장은 사법의 신뢰를 뿌리째 흔드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 다음은 글 전문
재판과 정치, 법관 독립
요즘에 재판과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과거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에 법원 판사들이 법률기능공으로 자기 역할을 스스로 축소시켜놓고 근근이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심리적 작용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정치에 부정적 색채를 씌우고 백안시하며, 정치와 무관한 진공상태에 사법 고유영역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고착시키며, 정치색이 없는 법관 동일체라는 환상적 목표 속에 안주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고착된 구시대 통념을 자각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했습니다.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 본연의 역할은 사회집단 상호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얼핏 존경할 만하게 보이는 훌륭한 법관이라 하더라도 정치혐오 무관심 속에 안주하는 한계를 보인다면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따라서, 개개의 판사들 저마다의 정치적 성향들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제는 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법관 독립을 보장함으로써 사법부 판결의 그러한 약간의 다양성(정치적 다양성 포함)을 허용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공존 번영에 기여할 것임을 우리 사회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방향이라는 자신감을 판사들부터 스스로 견지하면 좋겠습니다. 미성숙한 외부적 여건을 감안하면, 표현에서는 신중하게 할 일이지만, 이해시키고 설득해 나가야 합니다.
사람은 복제 로봇이 아닌 이상, 판사 개개인은 고유한 세계관과 철학, 그 자신만의 인식체계 속에서 저마다의 헌법해석, 법률해석을 가질 수밖에 없음이 자명합니다. 누구나 서로 다른 빠르기의 시간좌표계를 가진다는 진실을 밝힘으로써, 상식을 반성하고 통념을 극복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비슷합니다. 물론, 광속 미만에서 로렌츠 수축이 미미하듯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해석의 차이가 경미하겠지만요.
독립은 의무이기도 합니다. 판사는 양심껏 자기 나름의 올바른 법률해석을 추구할 의무가 있고 그 자신의 결론을 스스로 내리라는 취지가 헌법 제103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의 해석, 통념, 여론 등을 양심에 따른 판단 없이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명령이라고 말입니다. 차이와 다양성 자체가 의무일 수는 없지만, 법관의 독립을 긍인한다면 다소간의 차이와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파생합니다.
독립은 존재의 참된 본성입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佛家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하였고,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하셨습니다. 그대로 받들기가 정말 어렵지만 무척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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