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믿음이 주는 즐거움

입력 2017-08-31 18:38
친구들 믿음에 명곡 작곡한 거슈윈처럼
즐거운 시간 나누려면 서로를 신뢰해야

이경재 <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


길을 걷다가 문득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발을 멈췄다. 요즘은 신경을 못 쓰고 살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아 유난히 아이들의 모습이 유쾌하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린 시절에 참 재미있게 놀았다. 술래잡기, 땅따먹기, 사방치기, 자치기, 구슬놀이, 말뚝박기…. 정말 많은 놀이를 즐기며 보냈다. 놀이터에서 하던 놀이 중 미끄럼틀에서 하던 술래잡기가 생각난다. 요즘에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위험하지 않았나 싶다. 술래가 눈을 감고 미끄럼틀의 계단 아래서 열을 센 뒤 계단을 오르면 그 위에 있던 아이들이 미끄럼틀 구석구석에 숨어 술래에게 잡히지 않고 도망치는 놀이였는데, 아슬아슬하게 미끄럼틀 아래 숨어 있기도 하고 난간에 올라서서 술래의 손에 닿지 않으려고 숨과 웃음을 연신 참아가며 가까스로 술래를 피한다.

이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술래가 절대로 눈을 뜨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술래는 친구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조심조심 계단을 오르며 손을 저어 친구들을 찾는다. 술래가 아닌 친구들도 술래가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코앞에 서 있는 술래 앞에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놀이의 본질이 믿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 같다. 서로가 규칙을 잘 따를 때 스릴도 있고 즐거움도 커진다. 혹여 술래가 샛눈이라도 뜰라치면 친구들의 항의가 한여름 매미 소리만큼 시끄럽다. 물론 술래는 다시 한번 술래가 돼야 한다.

1900년대 초반을 살았던 음악가 조지 거슈윈은 ‘랩소디 인 블루’ 외에도 오페라 ‘포기와 베스’ 중 ‘서머 타임(Summer Time)’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작곡가다. 그가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기 이전에는 스스로 자신감이 부족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랩소디 인 블루’라는 작품으로 대중적 평판을 얻기는 했지만, 그는 지난 유명 음악가들처럼 어려서부터 치밀한 음악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10대 중·후반에 피아니스트로 취직해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스스로 음악의 이론적 배경이 얕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하루는 거슈윈이 믿음이 가는 친구이던 제리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친구 제리는 거슈윈이 어떻게 오페라의 스토리를 다루려는지 물었고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오페라 중에 나오는 합창 음악의 배치도 물었다. 거슈윈의 설명이 이어지자 제리는 “조지, 자네는 큰 오페라를 작곡할 준비가 잘 돼 있고 자격도 충분하다”고 말해 줬다. 거슈윈은 격려를 들으며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제리, 문제는 내가 조금의 재주와 뻔뻔스러움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네….” 스스로 재주가 부족하다고 여기는데도 과감히 오페라에 도전하는 조지 거슈윈에게는 믿음과 신뢰를 보이는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오페라 ‘포기와 베스’가 탄생할 수 있었고 또 여름이면 매력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서머 타임’이라는 노래도 나왔다.

즐거운 시간을 나눌 수 있으려면 신뢰와 믿음이 상호 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요즘 같아서는 음식점을 가도, 물건을 하나 사려 해도 늘 속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 아쉽다. 과자의 포장을 믿고 샀다가 과자보다 공기가 많은 데서 오는 배신감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조금만 더 믿어 보자. 눈을 감고 계단을 올라도 친구들은 반드시 그곳에서 키득거리며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경재 <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