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호 기자 ] ‘입도선매(立稻先賣)’는 지난 시절의 용어로, 궁핍한 농촌생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던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서 있는 벼를 먼저 파는 일’을 뜻한다. 예전에 돈에 쪼들린 소작농들이 벼가 여물기도 전에 헐값에 미리 판 데서 생겼다.
우리 사회의 청년실업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포세대’니 ‘고용절벽’ 같은 말은 이미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국립국어원 운영)에 올라, 여차하면 단어로 자리 잡을 태세다. 하지만 취업난 속에서도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분야 전공자들의 몸값은 날로 치솟고 있다고 한다.
‘궁핍한 농촌’ 상징하던 말
“미국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이 한국 이공계 인재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우수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경력이 없어도 일단 입도선매하고 보는 식이다.”
기업에서 미래산업을 이끌 고급 두뇌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때 쓰인 ‘입도선매’는 좀 묘한 단어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말을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돈을 받고 팖’으로 설명한다. 이 풀이는 입도선매하는 주체가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한자로는 ‘팔 매(賣)’자가 들어간 ‘立稻先賣’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한 대목이 그 용법을 잘 보여준다. “잘 여물었으면 제값을 받고 팔아야지 그렇게 ‘입도선매’ 모양으로 넘길 것이면, 무얼 바라고 공을 들입니까?”(표준국어대사전 용례)
입도선매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전까지 농촌경제에 극심한 폐해를 끼쳤다. 당시 가난에 찌든 농촌에서 성행하던 입도선매는 신문들이 다루는 주요 기사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 농촌사정은 어떠한가. ‘입도선매’ 또는 초근목피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여 가고 있을 따름이다.”(경향신문 1953년 3월25일자) 모두 ‘파는 사람’을 주체로 해서 썼음이 드러난다.
요즘 쓰이는 양상은 많이 다르다. 이런 식이다. “대기업들은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3학년 때부터 장학금을 주는 등 입도선매 작전을 펼치고 있다.”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입도선매 식으로 땅을 휩쓸어 가고 있다.” 여기서는 ‘사는 사람’(대기업/투자자)을 주체로 해 ‘(인재/땅을)사다’는 의미로 이 말을 썼다. 대부분 그렇게 쓴다. 이것을 굳이 한자로 하자면 ‘立稻先買’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전에 이런 말은 없다.
요즘은 좋은 의미로 많이 써
‘입도선매(立稻先賣)’는 지난 시절의 용어로, 궁핍한 농촌생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던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서 있는 벼를 먼저 파는 일’을 뜻한다. 예전에 돈에 쪼들린 소작농들이 벼가 여물기도 전에 헐값에 미리 판 데서 생겼다. 조선 말기 양반 지주들이, 특히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의 비호 아래 일부 악덕 상인과 지주들이 농민을 수탈하던 수단으로 쓴, 아픈 역사가 담긴 말이다.
요즘은 이런 구악이 사라진 지 오래니 자연스레 본래 의미도 희미해졌다. 대신 더 넓은 의미를 띤 말로 변했다. 예전의 입도선매는 농촌의 피폐한 생활상을 나타냈지만 요즘은 좋은 물품·인재 등을 남보다 앞서 확보한다는, 좋은 의미로 쓴다. 쓰임새 또한 ‘파는’ 것이 아니라 ‘사는’ 행위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은유라는 수사학적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확장’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이런 용법의 변화가 규범적인 관점에서도 정당성을 갖추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말이란 게 시대에 따라 의미와 용법이 달라지긴 하지만, 아직 괴리감이 있다. 사전 풀이와 현실 언어상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표제어 입도선매에 ‘立稻先賣’와 ‘立稻先買’를 함께 올려 구별해 쓰게 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선매(先買)’라는 단어를 이미 쓰고 있으니 어려울 게 없다. 우리말을 이치에 맞게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쓰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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