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72) 김유정 '동백꽃'

입력 2017-08-21 09:00
수정 2017-08-21 09:30
소작인 아들을 좋아한 주인공 '점순이'

찐 감자를 건넸는데 거절 당하자
얼굴이 붉어지고 …

폐결핵으로 죽기 전
2년 동안
30여 편의 단편을 쓴
김유정을 생각해보자


1930년대 17세 처녀의 사랑

그 시대 풍경을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익히면서 감동까지 받을 수 있는 장르로는 소설이 가장 적합하다. 2017년 대한민국 17세는 대학입시 준비로 많은 것을 절제하며 지낸다. 1930년대 17세는 어떤 압박을 받았을까.

<동백꽃>의 17세 점순이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너 얼른 시집 가야지?”라는 얘기를 듣는다. 남자는 스무 살만 넘어도 노총각이라고 불렸으니 1930년대 17세의 관심은 온통 결혼이었을 듯하다.

일제가 조선을 일본화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던 때, 학교에서 우리말도 배울 수 없고, 우리말로 문화 활동도 하기가 쉽지 않을 때 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동백꽃>을 읽기 바란다. <동백꽃>을 실은 <조광>이라는 잡지는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어로 글을 싣다가 끝내 종간되었다

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서울로 이주해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두 달 만에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고 선언한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야학과 간이학교를 운영하다가 방랑생활을 하거나 금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2년 남짓만에 쓴 단편들

그러다 소설가 안회남의 권유로 소설 습작을 시작했고 1935년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2년 동안 30여 편의 주옥같은 단편과 10여 편의 에세이를 남겼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김유정이 쓴 소설에는 작가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그 시대 사람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데렐라 신드롬’을 차용하여 만든 이야기는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신데렐라는 여자여야 하고, 백마 탄 왕자가 그녀를 구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공식이 어느 새 자리잡았다.

1936년에 발표한 <동백꽃>은 어떤가. 마름의 딸인 점순이가 소작인의 아들을 좋아해서 일부러 괴롭히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다. ‘저희는 마름이고 우리는 그 손에서 배재를 얻어 땅을 부치므로 일상 굽신거린다’는 주인공은 점순의 ‘신호’에 답하지 않는다. ‘내가 점순이하고 일을 저질렀다가는 점순네가 노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더 많이 사랑할 때 항상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대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이 움직이면서 사랑이 시작되는데 여자가 더 나은 위치일 때, 더 복잡하고 난감하다.

1936년에 남자 작가가 그린 여성 ‘점순이’의 행동을 눈여겨보는 것이 <동백꽃>의 독서 포인트이다. 점순이는 소작인집 아들에게 찐 감자를 불쑥 내밀며 “느 집엔 이거 없지?”라고 말한다. 봄감자가 맛있으니 얼른 먹으라는 말이 본심이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하고 고개를 돌리는 남자 앞에서 홍당무가 된 점순이, 애꿎은 닭을 괴롭히며 계속 남자의 주변을 맴돈다. 자신의 수탉이 거의 빈사상태에 이른 것을 본 남자는 ‘일 잘하고 얼굴 예쁜 계집애인 줄 알았더니 시방보니까 그 눈깔이 꼭 여우새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점순이의 닭을 때려 엎는다. 그 닭이 죽고 말자 남자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울음을 터트린다.

둘이서 동백꽃 향을 맡는데···

점순이는 “이 담부터 안 그럴 테냐?”라는 말로 남자의 약조를 받아낸 뒤 “닭 죽은 건 염려마라. 내 안 이를 테니.”라며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다. 둘은 동백꽃 꽃더미 속에 파묻혀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를 맡는다. 땅이 꺼지는 듯 정신이 아찔할 때 점순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둘은 황급히 도망간다.

남녀가 유별할 때 좋아하는 남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전하려는 여자, 일찌감치 철이 들어 사랑보다는 삶을 지키려는 남자, 80년 전 17세의 사랑과 삶의 방식에 웃음이 나다가도 처연한 마음이 든다.

무작정 철이 없어도 안 되고, 낭만을 멀리해도 안 되는 아름답고 복잡한 시기. 그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동백꽃>을 읽으며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이근미 < 소설가 >